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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공격이 2013. 4. 26. 14:22

 

 

[그래도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엄만 성 130425목

 

   어제 수요예배에 교회 예배실에 들어서니 뒤편 한 모퉁이에 한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깊은 생각을 하며 앉아 있었다. 잠시 묵례를 하고 수요예배와 함께 기도회를 마치자 전도사님께서 그 청년에게 기도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 말한다. 이름을 묻고 머리에 손을 얻고 기도를 하였다. 무언가 모를 찜찜함이 밀려왔다. 개척교회를 하면 늘 일어나는 경우라 나름 짐작을 하고 성도들과 인사하려고 예배실을 나왔다. 그 청년은 성도님들이 예배실을 다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듯하다. 혼자 들어가는 말로 오늘 밥을 한 끼도 먹지 않았단다. 그렇다. 배가 고픈가 보다. 배가 고파, 밥이 먹고 싶어 교회에 왔나보다. 교회는 일생에 처음와 보았다고 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성도님들이 그 청년을 데리고 우리교회 집사님께서 운영하시는 식당으로 안내하여 식사를 하게하고 다음 주일에 또 보자고 말했다.

 

 

   오늘 아침까지 그 청년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교회에 이런 분들이 간혹 들어온다. 그 청년도 그들 중 한 분일게다. 서툴고 무리하게 예단(豫斷)한다. 그럼에도 왜 기억아침까지 남아 있는 것일까? 그 청년은 막연하지만,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교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교회는 자신의 육체적인 배고픔을 해결하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교회는 그래야만 하여야 한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교회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래야만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반문한다. 교회가 왜 그래야 하는가? 라고, 교회가 당신들이 필요할 때만 찾아오는 곳인가? 우리들이 얼마나 시간과 물질과 즐거움의 유혹을 거슬리고, 세워가는 교회인데 게으른, 나태하고, 절제하지 못하는 당신들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만 하는가 하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에 나름 현실적인 이유와 합리적인 생각으로 공감하고 내면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하는데 아침까지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은 또 다른 진리의 외침이 있어 그럴 것이다. 기도가 되지 않는다. 외면하면 할수록 기도의 통로가 막힌다. 영적 답답함이 징계로 다가 온다.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변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현실적인 이유나 합리적인 생각으로 교회에 들어오는 이들을 대하지 않았다. 어떤 분이 영적인 상담이 필요하다고 교회에 들어와 몇 시간을 황설수설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결국 영적인 갈급함이 고향을 내려가기 위해서 약간의 차비기 필요하다는 요청으로 마감되어지면 나의 긴장감은 영혼의 고통으로 나를 한 동안 괴롭혔다. 방황하는 신앙생활을 이제 청산하고 열심히 예수님을 믿겠다는 고백은 몇 주를 지나지 않아 약간의 경제적 도움을 위한 이유는 비열함 되어 나의 영혼에 깊은 상처의 흔적을 남기고 만다. 어려운 성도님들의 헌신으로 전해진 쌀이 햇쌀이 아니라는 이유로 되돌아오는 일은 나의 영혼을 피폐하게 하는 통증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몹시 아파했었다. 그래서 울었든 기억이 남아 있다.

 

 

 

   “순수하고 아름다움과 순종의 요소로 자기 앞에 닥친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처음의 자세는 행동이 거듭될 때마다 조금씩 퇴색해 간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위해 시작한 사상도 시간이 지나가면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그 후에는 사고하는 즐거움이 목적이 되며 급기야 우리의 자존심이나 명성이 목적이 되어 버린다”는 C.S 루이스 말이 생각난다.

 

 

   그렇다. 비록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아직까지 교회에 희망을 두고 있다는 것은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들에게 마지막 갈 곳이 교회라는 희망은 우리들의 가장 큰 위로이고 사명이라는 진리가 있어 아직 내 내면의 외침으로 살아남아 있다. 그렇다. 이것이 마지막까지 그들에게 소망을 주는 교회로 사명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분명한 내면의 소리가 주의 음성으로 들려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