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교회영성묵상

"순종" 존비비안저

공격이 2010. 7. 8. 14:12

 

 

 

요약

 

엄만성 편

제목: 순종[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누리는 보호와 자유]

저자:존비비어 지음/ 윤종석 옯김

 

 

[목차]

 

제1부 그분의 날개 아래 거하기

1.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나의 의뢰하는 영오화

2.권위의 근원이신 하나님

 

제2부 순종함으로 자유하기

3.기쁘게순종하는 자녀를 찾으시는 하나님

4.미혹의 대가 사탄

5.순종의 씨앗, 불순종의 씨앗

6.순도백퍼센트순종

7.생명을 향해 열린문, 순종

 

제3부 하나님의 질서에 뿌리내리기

8.역사를 주관하시는 분

9.하나님나라의 법, 왕을 공경하라

10.배나 존경할 자

11.순종하는 마음, 복종하는 태도

12.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는 능력

13.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는 능력

13.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

14.생명을 살리시는 메시지

 

제4부 순종으로 깊어지는 믿음의 우물

15.모든 영역에서 권위 인정하기

16.순종으로 자라는 믿음

17.그분의 보호아래, 그 풍성하심 아래

 

 

[내용]

 

제1부 그분의 날개 아래 거하기

1.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나의 의뢰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다.

아담과 하화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덮어심 아래 자유와 보호를 누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불순종하는 순간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여 벗어 버린 그것 즉, 자신의 덮을 것을 절실히 필요하게 된다. 그들의 하나님의 권위에 불순종함으로 인류는 귀한 자유와 보호를 잃어 버렸다. 현실적으로 권위는 인기 있는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권위를 거부하거나 두려워하면 권위를 통하여 누릴 수 있는 놀라운 보호와 유익을 좋아지게 된다. 어린아이에게 있어 예방주가는 아프다는 것을 알지만, 더 큰 아픔을 겪지 않으려고 주사를 맞아야 한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무서운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말이다. 권위도 이와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방주사와 같이 불편하거나 심지어 고통스럽기 까지 한 진리를 만날 때 마다 이 예방주사의 예와 같다. 하늘아버지의 길은 완전하다. 당장은 쓰리고 아파 보이는 일도 실은 보호와 축복이나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라는 생각을 하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순수하고 완전하며 영원하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겠다.

 

2. 권위의 근원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가 날마다 우리에게 없다면 날마다 불법이 성행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귄위를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잘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민주주의는 세상나라들에게나 적합하다. 하나님나라는 글자그대로 왕국이다. 왕이 다스리는 곳이며 서열과 권위가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법은 중론이나 선거나 여론 조사로 대치할 수 없다. 신자로서 권위에 대한 현대문화의 사고방식대로 살아가려 한다면 잘해야 무기력하게 되고 최악의 경우 위험에 처하게 된다. 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자기사이를 가로 막아 버리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이 막히거나 아예 끊어질 수 있다. 그것을 마치 하나님은 풋볼대회를 감독하시는 데 우리는 야구를 하는 형국이 된다. 즉, 플러그를 꼽지 않고 전기제품을 사용하려는 셈이다. 민주주의 사고방식이 기독교에 스며들어 많은 사람들은 일명 자치 또는 민주라는 속임수의 길에 들어서게 했다. 이 길을 계속 가다보면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넘어 노골적으로 도전에 이르게 된다. 권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함으로 그런 태도를 드러낸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음을 자기도 모르게 나타낸다.

 

제2부 순종함으로 자유하기

3.기쁘게 순종하는 자녀를 찾으시는 하나님

 

우리는 죄를 정의할 때 아담의 상황을 생각해야 한다. 인류의 혈관에 아담의 범죄의 본질이 흐르기 때문이다. 아담이 인류를 그렇게 파멸에 넣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죄가 무엇인지를 모를 때가 많다. 죄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려면 성경에서 나오는 죄의 정의를 보아야 한다. 성경은 죄는 불법이라[요일3:4]라고 선포하고 있다. 불법은 법에 대한 무지나 위반으로 인해 법이 없이 존재하는 상태이다. 불법은 하나님의 법이나 권위를 복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죄에 대한 이런 정의는 죄의 본질적인 특성을 하나님의 법이나 뜻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자기의 뜻을 올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소유에 관한 관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즉각적인 복종보다 앞선다면 그것은 죄의 핵심에 해당된다. 그것을 불법이며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에 즉시 순종하는 것 보다 생업이나 사업을 중요하게 여기면 죄가 된다. 이것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도박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우자를 즐겁게 해 주려는 욕망을 하나님 뜻에 복종하는 것보다 중요하게 여기면 죄다. 아담은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는 쪽보다 아내인 하와를 택한 것이다. 아담의 이런 태도가 결과적은 인류를 죄인으로 만든 것이다. 죄는 간음, 살인, 절도 따위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불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죄인 것이다. 현대인들은 혼인잔치에 초청받은 자들과 같이 자기의 일정과 즐거움과 계획을 주님의 명령보다 앞세우는 습관에 젖어 있다. 정상적인 당연하게 여기는 행동을 한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복종하겠다던 고백대로 살지 않는 것이다. 자신들의 계획과 맞는 부분만 순종한다. 그러면서 불법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안타깝게도 바로 이것이 오늘날 믿는다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상태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순종하는 삶을 진정으로 열망하는 자녀들을 찾으신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믿는 이들을 언제나 기쁨으로 그분의 뜻을 행해야 한다. 순종에 따른 성공과 불순종에 따른 고생이 가득한 생을 마감하면서 솔로몬은 모든 시대에 적용할 지혜의 말을 남겼다. “일의 결국은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4. 미혹의 대가 사탄

말세는 인류역사상 가장 감격스러우면서도 가장 무서운 때일 것이다. 이전에 어느세대에도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 영광의 최고 계시를 목격하게 되기 때문에 감격스러울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영혼의 추수가 이어질 것이므로 말세는 영광과 기쁨과 심판과 두려움의 때가 될 것이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 사도바울은 그 환란의 때를 정부나 무신론자들이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때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미혹이 만연한 때라고 경고하고 있다. 미혹은 무서운 것이다.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이다. 미혹된 사람은 사실은 자신이 틀렸음에도 불구하고 옳다고 굳게 믿는다. 미혹의 근원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불순종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그 심령과 생각 속에 미혹이 들어 온다. 그런 사람은 사람은 자신이 틀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확신한다. 오늘날 훌륭한 설교와 교육을 좋아하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 보다는 자기 삶을 더 사랑하는 교인들이 많다. 우리는 그 누구, 그 무엇 보다 진리를 더 사랑해야 한다. 안락이나 생명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간절히 원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을 위해 자기 소원을 흔쾌히 내려놓을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권리와 특권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 분을 하나님이요, 우리의 창조주와 구속자이며 우리를 향하 사랑이 완전한 분이기 때문이다. 오직 이 사실이 우리를 미혹에서 지켜준다. 불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 신자들에게 효과를 낼수 없으므로 불법은 미묘한 속임수 이다. 이것이 바로 불법의 신비이다. 우리가 이 신비나 비밀을 모르기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신다[고후 2:11] 에덴동산에서 하와는 속아서 불순종하게 되었으나, 아담은 자기가 하려는 일을 알았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뻔히 알면서도 보란 듯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은 미혹 당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강팍하여 좀처럼 깨우치기 힘든 사람들이다. 물론 미혹 당하는 사람들도 있다. 불순종하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그렇다. 하와처럼 그들도 무지 때문에 미혹에 빠진다. 불법이라는 은밀한 세력에 걸려드는 것이다. 무지는 미혹의 온상이다. 하나님은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 무지함으로 인하여 사로잡힐 것”[사5:13]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길과 영적법칙에 대해 계시한 지식이 대적의 미혹에서 우리를 지켜준다. 그분의 진리의 빛이 거짓을 밝히고 우리를 보호한다.

 

5.순종의 씨앗, 불순종의 씨앗

불순종의 결과는 다양하다. 언제나 즉시 눈에 띄거나 분명하지 않아도 씨를 뿌리면 거두게 될 것이 분명하고 그 여파 역시 확실하게 나타난다. 영혼의 대적인 사탄은 이 지식을 우리가 모르게 하려고 한다. 우리가 순종을 경시하고 미혹하는 전략에 쉽게 넘어가길 바란다. 순종하기 않기로 결정하면 즉시 생기는 이득에 비하여 불순종의 결과는 대단치 않다는 논리를 무의식중에 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미혹적이고 치명적인 사고방식이 얼마나 널리 퍼져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것이 불법의 신비 내지 은밀한 세력이다. 불순종의 순간 상황이 변한다. 불순종 전에는 전적으로 영혼이 우리를 지배하였으나, 불순종 순간부터는 육체가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 아담과 하와는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식하여 살았다, 그러나 불순종의 순간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것은 하나님 밖에서 선악에 대한 지식의 근원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 판단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을 다스릴 하나님이 필요 없다. 자기들 안에서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이 생겼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나 다니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한번은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의 불법에 대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 미혹하는 불법의 세력이 다스리지 않도록 사람들을 지키고 이미 그 손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어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진실로 믿는 자들의 사명이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 눈을 열어 불순종의 영역을 보게 하신다. 그러나 먼저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가인처럼 우리도 진리를 볼 수 없게 된다.

 

6.순도백퍼센트순종

사울의 삶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권위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 삶의 영적인 결과를 한결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원로 선지자인 사무엘이 하나님이 하신 명령을 가지고 사울을 찾아 아멜렉과의 전쟁에서 아멜렉의 소유라면 인간이든 짐승이든 하나도 살려두면 안 된다 라고 말하고 호흡이 있는 모든 것을 죽여라 말한다. 이에 사울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아멜렉 왕을 살려둔다. 사울은 동물을 수 없이 죽였다. 그러나 가장 좋은 양과 소, 기름진 것, 모든 좋은 것들을 죽이지 않고 백성에게 주어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게 했다. 사울은 수 만명을 죽였지만 한사람을 살려두었다. 명령의 99%는 수행했지만 1%를 수행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는 그런 행동이 순종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불순종으로 보신다. 하나님은 그것을 거역이라 표현하신다. 부분적인 순종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전혀 순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99%의 순종도 실은 불순종이다. 사울은 자기 논리에 미혹 당했다. 사실은 틀렸으면서도 자기가 옳다고 믿었다. 그의 믿음은 인간의 논리에는 맞을 몰라도 하나님의 실체에는 상충되는 것이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이 순종하지 않는 것이 그때 처음이 아니다. 사무엘은 전에도 불순종하는 사울을 책망했다. 사울에게는 불순종하는 습관이 있었다. 일단 이 습관이 굳어지면 진리와 죄를 구별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7.생명을 향해 열린 문, 순종

거역은 사슬이다. 불법이 숨어있는 이 원리는 우리 사회 확연하게 영향을 미친다. 교회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힘들기는 하지만, 거역하는 신자들에게는 사술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예언자의 발람의 경우에서 우리는 거역이 사술의 지배에 의함을 깨닿을 수 있다. 본인 스스로는 사술의 저주를 이스라엘에게 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사술을 펼 수 없었다. 그는 “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할 사술이 없고, 그분의 교회를 해칠 복술이 없도다[민23:23] 우리는 이 약속에 힘을 얻어야 한다. 무당과 점쟁이가 소리지르고, 지껄이고 불을 붙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는 한사람도 해할 수 없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는 이길 수 없다. 잠언 26장2절은 그 진리를 강조한다.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

거역과 사술의 영적관계를 아는 발람은 왕에게 이스라엘 진안에 모압여자들을 몰래 들여보내라고 했다. 발람여자들에게 우상을 들어가게 하고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여 성적인 죄를 짓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게 했다. 거역이 이스라엘에 사술의 저주를 불러오리라는 것을 알 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발히 계시하신 내용에 불순종할때마다 사술의 저주의 영향력 아래 제발로 들어 가게 된다. 거역을 사술이기 때문이다.

 

제3부 하나님의 질서에 뿌리내리기

8.역사를 주관하시는 분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에도 우리는 순종하여야 한다.“ 각 사람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13:1-2] 각 사람은 자기 삶을 다스리는 모든 권위를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에 권위에 굴복하여야 한다. 모든 권위의 기원은 하나님이다. 예외는 없다. 그리스도인은 인간 권이에 접할 때 마다 성격을 넘어서 직분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가 그 사람들 위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권위에 순종한다. 그 사람 성격이 나의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그 사람이 그런 직분을 가질만한 사람리록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존중해야한다는 말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에게 복종한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위임한 권위에는 복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미혹된 것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법을 배우면 인간에게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권위와 그 분이 위임하신 권위 중 하나를 택해야 할 때가 있지 않는가? 그러 때가 있다. 그러나 신자 대다수가 생각하는 것 처럼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위임한 권위에 대하여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원칙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파멸하는 길에 접어들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아래 들어 갈 뿐만아니라 귀신의 세력이 합법적으로 들어올 길을 내어 주는 것이다. 계속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려면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에 관한 우리가 선택할 것은 단 하나다.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인정하여야 한다. 요셉의 일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부인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종국에서는 하나님께서 요셉의 인생에 직접하여 상황과 환경, 여건을 만드신 것을 확인하게 된다.

 

9.하나님나라의 법, 왕을 공경하라

순종은 주께 하는 것이고 보상 역시 그분이 하신다. 인간 그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왕이라는 지위에 담긴 하나님의 권위를 이해하고 인정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권위를 모른다면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에 복종하기 어렵다. 진정한 권위를 보지 못하다면 순종하려고 애쓸수록 힘들어지기 만 할뿐이다. 베드로는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벧전2:17] 권위에 복종하는 정도를 넘어서 공경하라고 권고한다. 베드로가 가르키는 왕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왕이다. 베드로는 왕을 한 인간으로 생각한 것이 아나라 하나님이 임명하신 권위를 지닌 사람으로서 왕을 공경하라고 권고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권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공경하고 위해서 기도하고 중보하며 그들에게 감사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들을 비방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그들을 욕하거나 비난하거나 놀리거나 대들어 싸우라고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하고 중보하고 감사하라 하신다. 모든 분야의 권위를 공경하여야 한다. 가정에서는 부모님의 권위를 공경하여야 한다. 아내는 남편의 권위를, 사회에서는 상전의 권위를, 교회에서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하기를 권면한다. 특히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그의 범사가 잘되고 장수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다른 이의 삶을 보지 말고 이 하나님의 약속에 믿음의 기초를 두어야 할 것이다.

 

10.배나 존경할 자

구약의 한나의 삶을 통하여 권위를 어떻게 공경하여야 하는가를 깨닿게 된다. 한나의 남편 엘가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나를 두고 둘째 아내를 취하였다. 둘째 부인은 아리를 못 낳은 한나를 조롱하였다. 한나는 여호와 앞에 나아가 울며 서원한다.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전심을 다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대제사장이자 사사인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하고 질책한다. 이 얼마나 심한 모욕인가? 한나의 고뇌를 만취한 자의 주정으로 여길정도로 엘리는 한나의 아픔에 무심할 뿐만 아니라, 영적인 감각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모욕을 받은 한나는 도리어 “ 나의 주의 그렇지 아니하니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열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 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다”[삼상1:15-16] 대제사장을 존중하며 공경하는 반응이다. 비록 엘리대제사장이 그런 반응을 받을 만한 행동이나 판단은 하지 못했지만, 한나는 귄위있는 엘리의 직분을 깍듯이 존중했다. 다만 자신이 악한 여자가 아님을 알리는 선에서 그쳤다. 한나는 엘리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고 자기행동에만 집중했다. 한나는 진정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였다. 지도자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 문제는 하나님이 다루실 것이다. 이런 참된 복종과 겸손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이런 한나의 권위에 대한 공경에 하나님은 둔감하고 세속적인 제사장의 말을 사용하여 약속의 씨앗을 주신다. 닫힌 태가 열리고 어둠 속에서 생명이 태어났다. 이듬해 한나의 품에 어린 사무엘이 있었다. 잉태되기 전부터 구별된 이 아이는 장차 이스라엘에 부흥을 가져온다. 위임된 권위가 하나님의 법에 위배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 권위를 떠나는 것이다. 교회에서 권위 있는 사람이 노골적인 타락이나 죄 가운데 있는는 것이 드러나면 그 사람의 더러운 샘에서 더는 물을 길어 마시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그런 경우에는 그 사람에게서 떠나라고 무척 단호하게 가르친다. 지도자의 삶이 타락했는데도 하나님이 아직 심판하지 않으셨다 해도 이생에서든 내생에서든 그 사람은 반드시 심판받을 것이다.

 

11. 순종하는 마음, 복종하는 태도

우리는 실제의 삶의 현장에서 아래와 같은 질문에 수없이 직면하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순종해야 하는가?

-지도자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권위가 잘못 결정하였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권위가 내게 잘못된 일을 명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디에 한계를 두어야 하는가?

위의 질문들은 권위에 자신 있게 복종 하려면 반드시 대답해야할 중요한 질문들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은 저희는 너희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게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

여기서 저자는 분명하게 순종하고 복종하기를 권면하고 있다. 순종이 권위에 반응하는 행동의 문제라고 하면 복종은 권위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다. 즉 우리가 권위에 대한 행동과 태도를 다 같이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물론 권위를 어디까지 인정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럴 때는 하나님의 말씀, 율법, 명령을 거슬리는 것을 한계로 하여야 한다. 그것이 최저의 권위에 대한 마지노선이 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성경의 사례는 다니엘의 태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단6:10]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권위에 대한 순종과 복종의 태도에 대하여 어느 로마인은 피박받고 있는 신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그들에게 조국이란 나그네의 처소일 뿐이다. 그들은 육신을 입었으나 육신을 따라 살지 않았다. 그들은 지상에서 나날을 살아가지만 천국 시민이다. 그들은 규정된 법률을 준수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삶은 법률을 능가한다.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은 미워할 이유를 전혀 댈 수 없다”[ Letter to Diognetus, 5장]

 

 

12.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는 능력

지도자에게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디서든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은 지도자의 비효율적 방법, 현명치 않는 결정, 현명하지 않은 대인관계, 필요 없는 과다한 말들, 자기 삶에 부정적 영향에 대해 하소연한다. 지도자가 무언가 약속 만해 놓고 감감 무소식이라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며 불평한다. 사실 상황은 점점 나빠지는 것 같다. 목사가 무엇 가를 못보고 있다고 확신하며 이제 목사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가 별개라고 생각한다. 이 논리는 불평을 불러들이며, 불평은 불복종으로 이어진다. 이제 미혹이 맞장구를 친다. 결국 이에 속아 권위를 등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성장시키고 보호하시려고 그 권위를 그들 위에 두신 것을 알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 대하는 태도에서 이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백성은 잠시의 현실적인 불편이나 부족을 만나면 그들의 추앙하였든 지도자모세와 아론을 권위에 도전하고 하였다. 모세의 리더쉽에 반발하고 모세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를 분리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모세에게만 불복종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그 불복종이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자기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갈라놓은 줄 알았다. 순종의 원리가 아니라 인간의 논리로 그들은 살았다. 시각과 환경에서 나오는 제한적인 논리대로 사는 사람들은 이미 미련한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룰 수 없다. 반면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여호수와와 갈렙 처럼 결국 약속을 누리며 살게 된다.

 

13.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

하나님 우리아버지께서 각 사람의 삶에서 이루시려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그 목표는 즐겁고 누구나 좋아하며 아픔이 없는 길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길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깨뜨리는 것이다. 분명히 말한다. 주님과 친해지려면 우선 상한 심령이 있어야 한다. 상한 심령은 희생적 삶이나 제사가 아니라 순종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깨어지는 것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권위에 대한 복종과 상관있는 것이다. 이 깨어짐의 과정은 주님의 처방에 따라 사람마다 독특하다. 그 과정을 제대로 수료하면 주님이 그 사람을 통해 하시려고 섬김을 할 준비가 된 셈이다. 그때는 그분만 아신다. 주님은 우리가 새로운 차원에 올라 갈 때 마다 다시 그때에 맞는 깨짐의 과정을 시작하신다. 주변에 있는 성숙한 신자들은 내가 깨어지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우리들이 권위앞에서 변명하거나 자신을 방어하는 행위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위임한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남겨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빌라도 앞에서의 예수님의 태도[자신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으시는 것]과 다윗의 사울에 대한 태도[사울은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종이다. 사울의 심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에 대한[불공정한 선생님에 대한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서 변호하도록 함]예를 들면서 권위에 대하여 변명이나 주장을 하면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호해 주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권위는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는가? 에 대한 의문이 생겨난다. 하나님의 만인제사장제도는 어떻게 되는가? 모든 사람에게 직접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인정하여야 하는 의문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일상생활 중에 권위의 손에 부당하게 대우를 당하는 경우를 만나게 된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한 뜻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 분은 그것을 사요하여 우리를 복 받을 자로 빚으신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장 9절에서 권고하고 있다. "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여 하심이라"

하나님은 그리스도처럼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권위를 약속하신다. 고난이 클수록 큰 권위를 맡기신다. 부당한 권위를 만나면 하나님의 복 받을 자리에 두셨음을 알아야한다. 바르게 반응해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분노와 원한을 품을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승자의 길을 택하자 그것이 생명의 길이다.

 

14.생명을 살리시는 메시지

모든 사람이 다윗처럼 지도자를 대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자기 위에 있는 사람들의 결점을 보면서 기쁘하고, 그런 결점으로 인하여 그 권위에서 이탈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도자들의 죄에 대하여 보이는 반응은 영적성숙도를 확실히 보여 주는 지표 중에 하나이다. 하나님은 우리 위에 있는 권위들의 잘못과 실수를 통하여 우리들의 심령의 참모습을 드러내실 때가 많다. 그 예를 노아의 아들에게서 볼 수 있다. 노아의 도덕적 실수는 세 아들에게는 시험이었다. 각 사람들의 심령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한 아들은 반항심이 있었고 어리석다. 두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며 실수를 덮어 줄 줄 알았다. 노아가 술 취한 것은 분명 훌륭한 본이 아니었지만 노아의 행동을 다루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그 아래에 있는 이들의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을 이해한 두 아들은 계속 아버지를 공경했다. 함의 행동은 논리상으로는 정당했다. 본 것만을 전했다. 사실에 충실했다. 그러나 순종과 공경의 원리는 다르게 말한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를 존경했고 복을 받았다. 함처럼 지도자에 대해 정확하게 보고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잘 못된 사람이 많다. 권위를 공경하는 사람은 큰 권위를 얻으며 존경을 받는다. 늘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그러나 권위를 욕하거나 경시하는 이들은 결국 자신도 멸시를 받으며 그 결과 심판을 받는 씨앗을 뿌리는 결과가 된다. 권위에 대항하는 것은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다. 이 심판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는 것과 아울러 모종의 재앙도 들어간다.

 

제4부 순종으로 깊어지는 믿음의 우물

15.모든 영역에서 권위 인정하기

교회나 정부나 사회의 권위가 있기 전에 가정이 있었다. 앞의 세 영역의 건강이 가정에 달려 있기 때문에 가정의 기능은 가장 중요하다. 다른 영역의 권위에 결함이 있더라도 가정만은 건강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면 다른 영역들이 반드시 영향을 받는다. 즉, 가정에 있는 권위는 다른 권위들의 필수 기초이다.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명령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다. 부모에게 순종하는자녀는 잘되고 장수한다.[엡6:2-3, 골3:20] 부모를 공경하면 성경의 놀라운 약속대로 잘되고 장수한다. 다음으로 성경에베소서 5장 24절에서 아내가 범사에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이 명령은 영적부분만이 아니라 삶의 일반적인 영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바울 "그[자기] 남편에게" 라고 했다. 한 아내에 대해 다른 남자들은 권위가 없고 그 남편만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아내에 대해, 목사는 교회생활과 영적문제에 국한하여 권위가 있고 상관은 가정 밖의 업무와 관련하여 권위가 있고 정부는 시민의 생활부분에서 권위가 있다. 따라서 가정에 관한 한 여자에 대한 권위가 있는 사람은 그의 남편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일을 시킨다면 아내는 그 지시에 순종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때에도 복종하는 태도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

 

16.순종으로 자라는 믿음

믿음은 권위에 대한 순종과 직결된다. 권위에 복종하는 만큼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 복종의 차원이 깊을수록 우리의 믿음도 커진다. 누가복은 17장6절의 말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리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말씀하신다.

믿음은 명령받는 것을 다 행할 때만 자란다. 우리가 명령받을 것을 다 행할 때 믿음이 자란다. 우리가 명령을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 주인의 뜻의 일부만 골라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끝까지 행하는 것이 종의 책임이다. 일단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면 바로 응답해야한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의 죽음은 곧 자기 생명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브라함은 순종에 대한 자신의 열정이 약속에 대한 욕망보다 크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우리에게도 그런 각오가 있어야 한다. 오! 주님 , 오늘 우리세대에 이런 사람들을 일어켜 주소서! 저가 그런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브라함이 그 아들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순종하는 행동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순종하는 행동과 함께 일하고 순종하는 행동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성격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의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순종하는 행동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순종하는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 니라”[야2:20-24,26] 믿음과 순종하는 행동을 인간의 몸과 영혼과 비교한다. 이 예에 따르면 믿음은 몸에, 순종하는 행동은 인간의 영혼에 견줄 수 있다. 둘은 반드시 함께 있어야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 영혼이 떠나면 몸은 죽는다. 한번 영혼이 떠나면 영혼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한 몸은 살아날 수 없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런 예를 통해 믿음이 순종하는 행동에 전적으로 의존함을 보인 것이다. 그래서 “순종하는 행동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순종하는 행동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2:18]고 말 한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다. 절대 착각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성경은 “순종하는 행동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 고 말한다. 즉, 믿음은 그 고백에 따라 나오는 행동이다. 그래서 성경은 듣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 믿음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이다.

참된 겸손의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고 하셨다. 이런 태도를 잃지 않으면 주님의 상을 받을 자리에 있게 된다.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진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는 이는 주님이 높이신다. 야고보는 “주 앞에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낮은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곧 순종의 상을 받을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자기가 순종했다는 사실 때문에 교만해 진다면 그것은 순종했을지라도 몰락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 교만은 모든 순종을 망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인간의 논리로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순종에 어긋나는 이론은 교만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그스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의 권위로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믿음의 조상의 목록에 올라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영광을 얻을 사람을 찾으신다. 사명을 실현하고 놀라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무리에 당신도 들어가기를 기도한다.

 

17.그분의 보호아래, 그 풍성하심 아래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죄를 깨닫는 아픔을 느꼈을 것을 이는 양심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고 출구가 있다고 한다. 출구란 회개를 의미하는 말이다. 죄의 자각과 정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둘 다 아픔이 따르지만, 하나는 출구가 있고 하나는 출구가 없다. 회개란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마음을 바꾸면 인식도 행동도 바뀐다. 그것은 이런 고백과 같다. “주님, 지금까지는 제 방식대로 해 왔습니다. 이제 그것이 부질없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지금부터 주님의 방식에 복종하며 살기로 다짐합니다.”그것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시작된 이성의 길을 버리고 순종의 길로 돌아선다는 선택이다. 우리가 세상의 길과 정반대인 길을 택한 것에 감사한다. 순종은 놀라운 우리 왕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앞당긴다. 순종은 큰 보상이 따를 것이다.

 

                                                                                                  2010.07.08

                                                                                                                                  [ 끝 ]

 

 

[나의 생각]

 

저자는 운명론과 결정론적의 입장에서 의지하여 저술하였다, 무리하게 순종이라는 단어를 적용하기 위하여 이성과 논리를 사탄으로 오인하는 오류를 범한다. 모든 현상을 그대로 순응하고 운명론의 받아들임으로서 인간의 하나님의 본성인 이성과 논리, 사고의 역영을 무시하는 오류마저 범하고 만다. 물론 세상만물이 하나님의 주관과 권위 아래 있음을 우리는 결단코 부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순종을 지지하고 행동하는 주체는 소외계층이거나 상대적으로 열악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거나 피지배계층에 속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에게 세상을 체념하고 기득권이나 지배계층에게 순종하기를 요구하는 우를 범하게 한다. 만약 이런 권위 앞에서의 순종의 강조가 지배계층이나 지도자, 혹은 리더들에 의해서 탐욕적으로 주장되어나 본인들도 모르게 주장되어 진다면 파괴자들과 이단들을 양산하게 하는 저자도 채 생각하지 못한 사탄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적 사고]

 

자유의지, 인간 행위, 무생물을 포함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건 원래 존재하건 간에,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만약 이 명제가 참이라면, 자유의지 개념이 온전할 수 있는가? 만약에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결정되어 있다면, 혹은 자연법칙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면, 어떻게 우리는 통제 범위 밖에 있는 것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가? 나는 다음과 같은 점을 논문에서 주장하고자 한다. 1) 만약 자유의지가 무원인적인 것이거나 혹은 인과 사슬에 구속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러한 의미의 자유의지는 자연 세계 내에 있는 결정론과 양립 가능하지 않다. 2) 우리는 어떤 이전에 존재하는 사건이나 행동에 의해서 결정된 행동에 대해서조차도 책임을 져야 한다. 3) 비록 결정론이 자유의지와는 양립 가능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도덕책임과는 양립 가능할 뿐만 아니라 요구된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선택과 관계없이 이 세계에 태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영구불변의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우리가 도덕책임 개념을 유지하고자 하는 한, 우리는 결정론과 양립 불가능한 자유의지 개념을 포기해야 한다. 도덕책임은 인간 사회의 질서와 발전을 위하여 가치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결정론 개념은, 신이 세계를 임의적으로 창조하지 않았다면, 신 개념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요구된다. 물론 우리가 모든 것이 원래 결정되지 않는 것이라서 어떠한 자연법칙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자유주의자가 아니라면, 결정론은 세계에 대한 일관된 믿음이다.

출처:학술논문 김형철 한국가톨릭철학회 / 가톨릭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