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전략

• 명확한 비전은 죽은 기업도 다시 살린다

공격이 2008. 4. 2. 08:43

[송재용 교수의 스마트경영][2]

 

• 명확한 비전은 죽은 기업도 다시 살린다

 

매년 20% 안팎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하는 초우량기업 아모레퍼시픽(옛 태평양)은 1990년대 초반 대규모 적자를 보고 존폐의 위기까지 몰렸었다. 태평양이 부실기업에서 초우량기업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명확한 비전(vision)에 바탕을 둔 구조조정에서 찾을 수 있다.

 

태평양은 1995년 경영위기 상황에서 ‘미(美)와 건강 분야의 강한 브랜드 기업(strong brand company)’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설정하고 이를 적극 실천했다. 명확한 사업 범위를 규정한 이 비전에 따라 화장품·녹차·제약 사업만 남기고, 금융 등 나머지 사업들을 모두 정리, 24개였던 계열사 수를 4분의 1로 줄였다. 또 전형적인 제조업체였던 기업체질을 ‘강한 브랜드 기업’으로 바꾸기 위해 계열사 매각으로 확보한 자금을 R&D(연구개발)와 브랜드·마케팅 역량 강화에 집중 투자했다. 그 결과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한방화장품과 기능성화장품의 효시격인 설화수·아이오페 등을 메가 브랜드로 성공시킴으로써 성장의 도약대로 삼았다.

 

■죽은 비전과 살아있는 비전의 차이

 

경영위기를 맞았거나 후발주자임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경쟁력을 강화해 지속적으로 높은 성과를 올리고 있는 기업들을 분석해 보면,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시대적 요구에 맞는 방향으로 전사적인 비전을 잘 설정해 조직 구성원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이를 일관성 있게 실천했다는 것이다.

 

기업의 비전이란 무엇인가? 비전이란 경영이념에 근거해 회사가 지향해야 하는 방향성과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목표를 규정한 것이다. 대부분의 기업은 5~10년마다 비전을 설정하지만, 단지 액자 속에만 존재하고 구성원들의 실제 의사결정에서는 고려되지 않는 ‘죽은’ 비전으로 전락해 버린 경우가 많다.

 

‘살아 있는’ 비전을 지닌 ‘비전기업(visionary company)’이 되는 것이 기업의 장기 성과에 얼마나 중요한가? 1990년대 경영분야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Built To Last)’에는 비전기업들이 동종업종의 경쟁 기업(비교기업)이나 시장평균 주가지수에 비해서 얼마나 우월한 성과를 올리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즉 비전기업의 장기 주가는 비교기업의 6배 이상, 시장평균 주가지수에 비해서는 무려 15배 이상 올랐다.

 

■삼성의 살아있는 비전

 

‘살아있는 비전’이 기업의 변신과정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지는 삼성전자 사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삼성전자는 1990년대 초반 국내 1·2위를 다투었지만, 세계시장에서는 저(低) 원가 기반의 2·3류 제조기업으로 인식됐다. 1998년 5000억원 정도 적자를 냈던 삼성전자가 2004년 전 세계 제조업체 중 두 번째로 많은 10조원 이익을 내는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출발점도 바로 비전에서 찾을 수 있다.

 

삼성은 1993년 이건희 회장이 주창한 ‘신경영’에 맞춰, 질적 고도화를 통한 ‘21세기 글로벌 초일류 기업’이라는 새 비전을 제시했다. 새 비전의 요체는 과거 삼성을 포함한 한국 기업들이 채택해 왔던 양(量) 위주의 비전을 질(質) 위주의 비전으로 바꾼 것이다. 양 위주의 비전은 저 원가를 기반으로 한 박리다매 전략과 지속적 신사업 진출을 통한 매출액 극대화에 초점을 맞췄다. 반면 질 위주의 비전은 맹목적 매출액 경쟁과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지양하고, 대신 기술력·브랜드·디자인 역량 등 본원적 경쟁력을 강화시켜 제품의 질을 획기적으로 업그레이드시키고 이익 창출력을 높이는 것이다.

 

신경영 비전은 당시의 시대 환경 변화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제시되었다. 즉 기술력이나 브랜드 파워에서 앞선 일본 기업들이 동남아 등지의 해외 투자를 강화하며 원가경쟁력마저 획기적으로 키웠고, 중국이 부상할 조짐을 보인 것이다. 게다가 1980년대 후반 이후 급격한 임금 상승으로 저 원가 경쟁력도 지속시키기 어렵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했다. 또한 무형 자산 위주의 경쟁력이 중시되고, 아날로그 기술에서 디지털 기술로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21세기 초반 메가트렌드에 대한 통찰력도 바탕이 됐다.

 

‘제품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경영·기술력·마케팅·디자인 역량 등을 갖춘 고급 인재를 확보해야 했기에 ‘사람의 질’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초점을 맞췄고, 우수 인재를 확보하고 활용하기 위해 ‘경영시스템의 질’도 업그레이드 해야 했다. 오랜 기간 양 위주 경영시스템을 운영해 왔고, 내부적으로는 글로벌 수준의 고급 인재 풀이 절대 부족했던 삼성에겐 매우 도전적인 과제였다. 하지만 10년 이상 일관성을 가지고 핵심 인재들을 확보·육성하고 조직구조, 문화, 가치체계, 평가·보상 시스템, 경영 프로세스 등 경영 시스템의 주요 요소를 질을 최우선시하는 비전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재정렬시킴으로써 마침내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은 비전을 살아있는 비전으로 만들기

 

그러면 많은 기업이 직면한 현실처럼 ‘죽은 비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비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살아 있는 비전이란 명확히 기업의 미래 방향을 제시해야 하고, 향후 상당 기간 지속될 외부환경의 메가트렌드와 고객 니즈(needs)의 변화에 부합해야 한다. 특히 좋은 비전은 기업의 장·단기 전략 수립에서 나침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즉, “이 전략이 비전에 부합하는가”라는 간단한 질문이 전략 수립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프리미엄 브랜드 육성을 통한 글로벌 일류 기업 달성이라는 비전을 가진 기업이 초저가 제품을 프리미엄 제품과 동일한 브랜드를 붙여 마구 밀어 낸다면 비전과 부합하지 않는 전략이 될 것이다.

 

둘째, 살아 있는 비전은 구성원들의 위기의식을 기반으로 공감대를 형성해 동기 부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 설정과 실행이 구성원의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노력없이 최고경영층이나 컨설팅 회사의 일방적 주도로만 이뤄진다면 이 비전은 죽은 비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구성원들의 의견 반영과 동참을 통해서 조직의 비전이 개인의 비전과 조화를 이룰 때 그 비전은 살아 있는 비전이 될 수 있다.

 

셋째, 효과적인 비전은 미래에 대한 꿈을 담고 있고 혁신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을 정도로 도전적이어야 하지만, 회사의 역량 등 현실적 조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달성이 힘든 비현실적 비전은 구성원들의 도전 의욕 자체를 불러 일으키지 못해서 죽은 비전이 될 공산이 크다.

 

넷째, 삼성과 태평양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비전 달성은 전략뿐 아니라 사람과 경영시스템의 변화를 수반해야 하는 장기적이고도 어려운 과정이다. 따라서 최고경영층의 리더십과 구성원의 믿음을 기반으로 한 일관성 있고 지속적인 추진이 요구된다.

 

 

 

■비전은 기업의 나침반

 

상당 기간 효과적이었던 비전도 시대적 상황이 변하면 유효성이 떨어져 재설정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다. 기업의 경영이념과 핵심가치는 장기간 계속 유지돼야 하지만 비전은 중대한 환경 변화가 있으면 수정돼야 한다. 최근 이건희 회장이 주창하고 있는 ‘창조경영’이라는 새 경영의 패러다임도 아직 신경영만큼 구체화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돼야 할 것이다. 신경영에서 추구해 왔던 ‘질적 고도화를 통한 21세기 글로벌 초일류기업’달성이라는 비전은 여전히 상당 부분 유효하지만 이제 삼성이 선진기업의 벤치마킹을 바탕으로 제품, 사람, 경영의 질을 글로벌 일류 수준으로 끌어 올린 시점에서 한 단계 더 도약, 명실상부한 글로벌 초일류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창조경영에 초점을 맞춘 새 비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따라서 새 비전의 핵심은 벤치마킹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제품·기술·비즈니스모델을 선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미래 신성장 동력을 확보해 이익 창출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이 역시 구성원들의 공감대 형성과 경영시스템의 재정렬, 창의적인 인재 확보와 활용이 성공의 관건일 것이다.

 

비전은 기업의 방향성을 정하는 나침반 구실을 한다. 환경변화가 과거보다 빨라지고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고 해서 회사의 비전을 설정하지 않는 것은 마치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비전을 잘 설정하고 이를 살아있는 비전으로 만들 때 그 기업은 장기간 높은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발행일 : 조선일보.2007.09.22 / BZ3 C3 면 기고자 : 송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