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교회영성묵상

재침례교

공격이 2007. 11. 14. 10:44

 

       재침례교(Anabaptists) 운동

 

정수영 목사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재침례교도들만큼 억울하게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한 무리들은 없을 것이다. 이들은 카톨릭에 의해서도 죽임을 당하였고, 개혁교도들에게서도 죽임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기록이나 평가마저도 가장 왜곡외고 굴절된 상태로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이들 재침례교도들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재인식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여기서 이들 재침례교도들의 순수한 신앙과 정열적 삶의 진솔한 면들을 살펴봄으로 그들에 대한 올바른 성격 규명을 해보고자 한다.

첫째, 침례라는 용어에 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교회사 책에 보면 '재세례파'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원래 쓰인 아나벱티스트(Anabaptist)라는 말은 말의 뜻이나 역사적으로 이 운동을 펼친 사람들을 제대로 안다고 하면 재세례라는 말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쓰인 아나벱티스트는 두번째,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제 살펴보려는 아나벱티스트들은 이미 받은 유아세례나 성인세례가 성경적 근거가 없으니 다시 침례를 받으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洗禮와 浸禮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 참고).

여기에 대한 논증은 「새교회사I」(p.36-42)에 언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두번 받으라는 뜻을 가진 재세례란 용어는 적당하지 않은 말이다.

둘째, 이들 재침례교도에 대한 지금까지의 기록들이 문제가 많다고 하는 사실이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독일의 토마스 뮌쩌(Thomas Muntzer)가 그 사회 혁명운동의 기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뒤를 이어 엥겔스(Engels), 마르크스(Marx), 레닌(Lenin) 등 으로 계승되었다고 설명한다.

또 독일의 역사가요, 종교 사회학자였던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 d, 1992)는 재침례교도들을 완전주의와 성결(holiness)을 목표로 지향하는 분파(sects)주의자였다고 한다.

또 역사가 알브레흐트 릿츨(Albrecht Ritschl)은 경건주의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재침례교도들은 엑스타시(ecstacy)를 추구하는 영적 수도자들과도 같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교회사의 대가인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재침례파를 과격한 복음주의자들이며, 극단의 프로테스탄트(Ultra Protestants)라고 하였다.

그 외에도 스피츠(Lewis W.Spitz)는 과격한 개혁자들이라고 하였고, 린제이(Thomas M. Lindsay)는 경건한 기독교 공동체의 직접적인 계승자들이었고,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산 자들이라고 하였다.

또한 래토레트(Kenneth S.Latourette)는 재침례교도들은 높은 수준의 도덕을 요구하며 열렬한 선교열을 가진 급진적 개혁주의자들이었다고 하였다. 그 외에는 재침례자들을 이단이라고 서술함은 물론이고, 이들에 대해 편파적으로 설명한 기록들이 주종을 이룬다.

그렇다면 재침례교도에 대한 견해가 왜 이렇게 다양할까. 그것은 루터나 쯔빙글리, 칼빈의 개혁은 한 사람의 단일체제로 개혁운동이 전재되었지만 재침례교도들은 한 사람의 운동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운동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일어난 장소도 어느 한 곳이나 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들은 스위스, 독일, 화란, 모라비아 등 유럽 전 지역에서 일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각 운동은 자발적이기는 했으나 다양했다. 그들의 운동이 자발적이었다는 말은 순수했다는 뜻이나, 다양했다는 말은 조직력이 없어서 큰 일을 못했다는 뜻이다.

재침례주의자들은 개혁의 방법으로 수단에 있어서 보다 순수한 신앙적이기를 원했다. 그런데 너무 심한 핍박으로 변질된 그룹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재침례교도들의 운동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중세생활의 양대 흐름을 제대로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곧 신앙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이다. 이 두 가지 흐름은 모든 개혁자들에게 다 공통적으로 있었다. 루터의 경우를 보자.

그가 처음에는 면죄부 반대라는 신앙적 문제로 개혁을 시작했다. 그러나 신앙문제를 제대로 확립하기 위해서는 교황권과 싸워야 했고, 황제와도 싸워야 했다.

이때 루터는 슈말칼트(Schmalkald) 동맹이라는 사회운동으로 그의 개혁 과업을 수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는 신앙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완성은 세상의 힘인 무력으로 완성했다.

쯔빙글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취리히에서 설교와 논쟁을 통해 개혁을 시작했으나 논쟁만 가지고는 개혁을 완성할 수 없었다. 스위스의 다른 자치주들과 정치적 연합을 해서 전쟁으로 개혁을 완성하려다 실패하고 말았다.

이 점에 있어서는 칼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네바에서 제네바 시의회의 협력 없이는 그의 개혁을 완성할 수 없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나 영국, 화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재침례교도들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종교와 정치의 엄정 분리라는 대원칙 때문에 신앙운동을 사회운동과 연결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순수한 신앙운동만 고집하다가 수없는 희생만 당하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종교와 정치가 엄정 분리라는 큰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결과는 카톨릭의 공헌도 아니고, 더구나 개혁교회의 공헌도 아니다. 이것은 분명 수백만 이상의 재침례교도들이 피를 희생하여 얻어진 결과라고 본다.

셋째, 재침례교도들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재침례교도들 중에는 신앙운동만 아닌 사회운동으로 치달리다가 세인의 비웃음을 자아낸 비극적 무리들도 있었다. 그들이 순수 재침례교도들인가, 아니면 그 당시 과격한 운동을 빚은 자들과 재침례교도와 어떤 연관성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연구 과제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 두 사이(순수 재침례교도와 과격한 사회주의성 무리들)가 연구할 과제이지 이 두 사이가 하나라고 단언한다는 것은 지극히 비역사적 자세이다. 내가 믿기에는 이 두 사이에는 엄연한 구별이 있다. 그것을 이 장에서 밝히려고 한다.

그런데 거의 모든 이가 구분 없이 다 같은 것인 양 취급하고 있다. 이들 재침례교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있는 여러 갈래의 각기 다른 성격들을 알 필요가 있다. 볼링거라는 쯔빙글리의 사위는 재침례교도 안에는 13개의 서로 다른 분파가 있다고 하였다. 재침례 운동이 여러 나라 여러 곳에서 일어났는데 그 운동들의 성격을 대략 분류하면 여섯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복음주의적 재침례교도(Evangelical Anabaptists) ② 명상적 재침례교도(Contemplative Anabaptists) ③ 혁명적 재침례교도(Revolutionary Anabaptists) ④ 영적 복음주의 재침례교도(Evangelicalz Spiritualists) ⑤ 영적 이성주의(Rational Spiritualists) ⑥ 영적 혁명주의(Revolutional Spiritualists)

(중략 … 추후에 올리겠습니다 ..)

이렇게 볼 때 재침례교도들은 다같은 개혁 교도들이 아니었다. 개혁파(칼빈과 쯔빙글리)에서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재개혁한다는 뜻에서 개혁교리를 강조하며, 개혁파라고 부른다.

그러나 재침례파는 루터파, 개혁파 이상의 개혁을 하여 성경적 신약 교회로 돌아갈 때까지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재침례교도의 이상과 정신을 이어받은 침례교회들은 자기들이 개혁교파 중에 하나가 아닌 것임을 주장한다. 여기에 대한 것은 지금까지의 역사적 사실들이 증명하고 있다.

재침례교도들이라고 해서 왜 오래 살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들도 루터파나 개혁교회들처럼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가 믿는 바 성경의 진리가 그것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고초를 다 당했다.

그들은 그렇게 고초를 당하면서도 전혀 의심이 없었다. 그 까닭은 그렇게 사는 것이 주님이 바라고 원하는 삶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과거 지나간 역사를 배우면서 오늘 우리들의 삶의 의식과 자세를 깊이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 우리들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가, 지금 내가 열심히 하고 있는 일들이 과연 꼭 해야 될 일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지금 잘못 살아간다면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도 우리가 과거 여러 선배들을 평가하는 것처럼 우리를 평가할 것이다.

 

 

호서신학(jmssa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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