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교회영성묵상

개혁주의 영성

공격이 2007. 11. 14. 10:05

I.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성”이란 말이 근래 자주 들려온다. 최근에는 개 교회에서나 신학교육현장에서 영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그 예로써, ‘영적인 삶’, ‘영성’, ‘영성훈련’, ‘영성신학’과 같은 단어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기독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이 “영(spirit)"와 관련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영“의 형용사인 ”영적인(spiritual)"이라는 말에서 “영성(spirituality)”이라는 용어가 발생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1. 언어적 고찰

“영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성”(靈性)이란 말은 영어, “spirituality"를 번역한 말이다. 그러나 구미 학자들조차도 이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만족할만한 설명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산드라 슈나이더(Sandra M. Schneider)는 그의 책 「신학과 영성」(Theology and Spirituality)에서 “영성이란 아직도 누구에게나 만족을 줄 만큼 분석적이고 분류된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고 고백하고 있다.

 

(1) 혼란스러운 사용

이처럼 “영성”에 대한 정의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안영권 교수는 그 이유를 “분명한 이해 없이 애매모호하게, 그리고 또한 잘못 사용”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송인규 역시 “영성” 이해의 어려움이 지극히 다양한 사용 범위에 있음을 지적한다 :

“이 말을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때 그 경우가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가장 빈번히 사용된 개념이 의문 없이 다른 경우에도 적용되거나, 사실은 별도로 생각해야 할 영역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수가 많이 있다.”  즉 영문 ‘spirituality,' 'spiritual’이 ‘영성,’ ‘영적,’ ‘신령한,’ ‘거룩한,’ ‘은혜로운,’ ‘영력(靈力)있는,’ ‘믿음이 좋은,’ 등으로 혼란스럽게 번역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유명한 기독교 저술가인 루이스(C.S. Lewis)는 ‘spirit,’ ‘spiritual'이라는 말과 관련하여 그 언어의 의미를 5가지로 밝히고 있다 :

그러나 많은 책에서 “영” 혹은 “영적”이란 말을 인간 안에 있는 상대적으로 초자연적인 것을 뜻하는 것으로 쓰기도 하기 때문에 많은 혼란이 빚어집니다. …… “영”, “영적”이라는 말이 영어에서 쓰이거나 과거에 쓰였던 의미들을 열거해 보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1. 화학적 의미 : '알코올(Spirits)은 매우 빨리 증발한다‘(영어의 Spirit에는 “알코올”이라는 뜻도 있음-역자주)

2. 의학적 의미(이 뜻은 이제는 통하지 않는 구식 의미) : 옛날 의사들은 인체에는 “기질(the Spirits)이라는 극히 미세한 액체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의학에서는 이런 견해가 사라진지 오래지만 거기서 나온 표현 중 아직도 쓰고 있는 게 있습니다. 기분이 좋다(in high Spirits). 의기 소침하다(in low Spirits). 말이 원기있다(Spirited). 소년이 동물 기질이다(full of animal Spirits)하는 표현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3. 단순히 “육체적”이나 “물질적”의 반대 개념인 “정신적” (Spiritual)이란 뜻으로도 자주 쓰입니다. 즉 사람 안에 있는 비물질적인 모든 것(감정, 정열, 기억력 등)을 자주 그렇게 부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의미에서 “정신적”인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비물질적이라는 사실 자체에 무슨 훌륭한 점이 있는 건 아닙니다. 비물질적인 것도 물질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고 중립적일 수도 있습니다.

4. “영”(Spirit)은, 모든 인간이 지음 받으면서 부여받은 상대적으로 초자연적인 요소, 즉 이성적 요소를 뜻하는 것으로 쓰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그 단어의 가장 흔한 용법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도 ”영적“인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 의미에서의 ”영“은 피조물이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가장 나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들이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기독교 저술가가 “영”, “영적” 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인간이 자의로 신의 은혜에 복종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 될 때에 그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생명을 뜻합니다. “영적”인 것이 항상 선한 것은 오직 이 의미에서 뿐입니다.

한편 웹스터 사전은 “영(spirit)”을 “몸과 구별되는 인간의 지적 혹은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웹스터 사전은 현대인의 영 이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것은 영이 반드시 종교적이며, 초월적인 존재만을 의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영(spirit)은 인간의 지적 활동을 포함한다는 일반적 이해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웹스터 사전은 “영적인(spiritual)”이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 역시, 그 단어가 종교적인 사건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일과도 관련이 되어 사용된다고 함으로써 “영”의 사용 용도가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영성” 역시 교회나 종교인(제사장 포함)에 관련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 인간 영혼의 삶과 관련된 모든 관심에 적용된다.

결국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영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 단어의 어근이 되는 “영”이라는 단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한다. “영”이라는 단어는 중요한 성경적 용어이다. 히브리어의 ‘루아흐’와 헬라어 ‘프뉴마’는 숨, 바람, 그리고 영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영광 거룩한 성령 두 가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영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영성을 어떻게 이해하는 지가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용되는 “영성”은 이러한 일반적 설명을 뛰어 넘는다. 그래서 넬슨 테일러(Nelson Thayer)는 “영성이란 대단히 모호한 주제이다. 그렇지만 영성은 우리가 존재하는데 있어서 매우 본질적인 사항이기 때문에 영성에 대한 정의를 쉽게 단정지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2)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언어

두 번째로 “영성”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영성’이라는 말이 구약이나 복음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그야말로 오순절 이후 생긴 단어라는데 있다.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로렌스 지쳐즈(Lawrence O. Richards)는 ‘영성’의 불확실성을 성경과 관련지어 말하고 있다 :

영성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이처럼 불확실한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에 관하여 가르치기 위해 표상들과 관념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데에도 부분적인 이유가 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표상들과 관념들 가운데는 열매, 성장, 성숙, 성화, 거룩, 사랑 등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영성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 우리가 영성에 대하여 명쾌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혼동 가운데 있는 대부분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예를 들어, 거룩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거룩 그 자체는 영성과 같은 것이 아니며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충분히 조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통합적 이미지도 아니다.

즉 영성은 성경적 용어로서의 표준이 없이 시대를 지나오면서 다양한 명칭으로 표현되고 있다.

영성이란 단어를 구미 유럽에서 맨 처음 사용한 사람은 1583년 영국인 필립 스투베스(Philip Stubbes)였다. 그는 자신의 책 「Anatomie of Abuses」에서 영국의 국교회의 신부들이 자신들의 지위와 권위를 함부로 남용하는 것을 반박하면서, ‘성직자(clergy)'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다. 즉 직분에 성실하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그 영성의 남용들과 부패함”이라고 공박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기독교 역사에서 ‘영성’(Spirituality)이란 용어는 터툴리안으로부터 시작하여 초대교회와 각 시대 교회사에서 그 의미와 뜻을 달리하면서 사용되어 왔다. 즉 “영성”에 대한 이해가 시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사전에서는 “영성”이라는 용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영성이라는 용어는 대단히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어 왔다. 프랑스인들은 이 용어를 삶에 대한 보다 뛰어난 인식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으며, 미국의 선험주의자들은 초월적인 지성을 특별히 가리킬 때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또한 종종 죽은 자의 영들이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들과 의사 소통을 하게 되는 매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복음주의적 기독교에서는 보다 온화한 종교적 감정을 지칭하기 위하여 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용어는 신약성서의 신도들의 독특한 속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고유하고 특수하게 사용된다.

이처럼 사람들은 ‘영성’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러왔다. 즉 단순한 ‘영성'(spirituality)은 좀더 구체적으로 영성신학(spiritual Theology)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영적생활(spiritual life), 신심생활(信心生活, devout life), 초자연적 생활(supernatural life), 내면생활(inteior life), 신비적 상승(mystical evolution) 및 기독교 완덕(完德)의 신학(theology of Christian perfection), 수덕(修德)신학(ascetical theology)과 신비신학(mystical theology) 등의 용어로 표현되어져 왔다. 그리고 그 단어들의 의미는 그것을 사용하는 신학자에 따라 상당히 다양하다. 여기서 대표적으로 수덕(修德)신학(ascetical theology)과 신비신학(mystical theology)이라는 ‘영성’을 가리키는 용어를 카톨릭 측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사용하고 있으나, 개신교에서는 수덕주의(asceticism)를 고행이나 자기 부정의 실천을 언급하는데 보통 사용하며, 또한 신비신학이라(mystical theology)는 용어는 신비학, 심령술, 종교적 엑스타시, 특수한 심리현상 등의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등 부정적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3) 초종교적 용어인 “영성”

‘영성’을 이해하기 어려운 세 번째 이유는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종교에 걸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용어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들수 있다. 물론 “영성”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먼저 사용한 용어이다. 그러나 오늘날 영성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서 모두 사용하고 있다.

“영성”은 일반적으로 ‘어떠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든지, 또는 누구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자기의 정신으로 내면화시켜서, 소크라테스의 정신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스토아 철학자들은 스토아주의 영성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영성이란 용어는 자기가 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정신을 자기의 정신으로 받아들여 그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거는 것을 의미한다. 심청전에 나오는 심청은 ‘효’라는 정신에 생명을 건 유교적 영성의 한 모범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힌두교의 브라만 영성, 불교의 니르바나 영성, 유교의 상제 영성 등의 용어가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개신교는 이 용어에 익숙하지 않다. 그것은 개신교에서 전통적으로 쓰여온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신교에서는 지금부터 겨우 30여년 전부터 영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어떤 기독교인들은 “영성” 이라는 말을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자력(自力)”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주의나 복음주의 써클에 있는 교회들은 이 용어에 대해서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경건(piety)' 혹은 ‘헌신(devotion)'이라는 말로 그 가치를 대신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경건은 시간이 지나면서 ‘교리에 대한 인정’의 지적인 부분으로 흐르면서 개혁주의 신앙이 경직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개혁주의 내에는 경건을 말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교재나, 삶의 문제보다는 신학적 전개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교회에서는 다시 영성이란 용어를 통해 기독교를 이해하고 소개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몇 세기 동안 열렸던 신학 학술토론회에서 ‘영성’이라는 주제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사실을 생각할 때 현재 개신교의 “영성”에 대한 관심은 놀랄만한 일이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 모두 “영성”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개신교는 제6차 WCC 대회에서 중요 주제들 중 하나로 “영성”이라는 주제를 채택하였으며, 영성에 대한 주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1984년, 1986년, 1987년에 계속해서 협의모임을 열었다. 특히 WCC는 영성이라는 주제를 통해 타종교와의 대화를 유도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교계에서도 이러한 영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1984년 4월 전국신학대학협의회(KAATS) 제19차 정기총회에서 ‘신학교육에 있어서의 영성훈련’ 이라는 주제강연이 있은 이래, 한국 개신교 내에 영성신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2. 학자들의 제견해

  영성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종교적인 가치에 붙잡혀서 사는 영적인 삶의 상태”를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이 용어와 혼돈 하는 다른 한 표현인 경건(Piety)이라는 말은 “종교적인 의무에 충실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순수한 의미에서 영성(靈性)과 경건(敬虔)은 같은 종교 생활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 학자들의 “영성” 정의

그렇다면 기독교의 영성은 무엇일까? 넬슨 타이어(Nelson S.T. Thayer)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 있어서 영성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 있어서 영성은 삶에 있어서의 궁극적인 힘과 의미의 원천에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들을 경험하느냐 하는 문제와 어떻게 우리가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관계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과 관계를 가진다. 영성은 단순히 내적 감정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경험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통합성과 일관성에도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영성에 관한 정의는 학자마다 그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자

1) 심상태 박사는 “영성”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신심(信心;pietas)이라는 말과 관련되어 사용한 용어로서 “하나님 앞에서의 외경스러운 처사로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외경심의 표출”로 정의한 바가 있다.

2) 현대 독일신학자 판넨베르그(Pannenberg)는 영성이란 기독교의 메시지를 통해서 인간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요,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에 대한 추구라고 말한다.

3) 샤르뎅(Teil hard de chardin)은 “영성은 우주 생명 그 자체의 최고의 꽃핌이요, 최종 승화된 모습이며 우주 생명의 본질적인 마지막 종착역이라면서 하나님의 영적 현상으로 정신권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존재계의 현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4) 카톨릭 신한자 칼 라너(K. Rahner)는 “영성이란 인간이 창조때부터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초자연적 생명이며 세례로 말미암아 죽었던 속사람의 생명이 다시 소생하여 살아난 은총의 생명으로 성체 성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성장 성숙하는 실제적인 초자연적인 불멸적 생명이다”라고 정의하였다.

5) 홈즈(Urban T. Holmes)는 “기독교 영성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요, 그 관계는 감각 세계를 초월하여 주체의 노력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확장되고 고양된 의식으로서 인식하며 그 본질은 역사적 배경속에서 주어진 것이며 그 모습은 이 세상속에서 창조적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고 말한다.

6) 췌이퍼(L.S. Chafer)는 “참된 영성이란 성령 충만한 자 안에서 또한 그를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발현이다.”라고 하면서 인간의 영적 존재의 가치를 성령과의 관계에서 강조한다.

7) 김경제는 “영성은 지(知), 정(情), 의(意)를 통합총괄하는 인간 존재의 본 바탕이며 인간성 안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며 마음이 자신의 존재의 근거인 하나님과의 교류, 합일, 동역을 체험하는 영혼의 핵이요, 영성훈련은 본질적으로 성화의 과정이며, 영성은 인간 영혼의 독특한 고백이 아니라 삶의 현실과 역사 현실을 포괄하여야 하며 영성의 사회적 차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8) 오성춘은 “영성은 우리 속에 이루어지는 어떤 성품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의 과정이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고쳐 나가시는 과정이요,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받는 형제, 자매들 속에 나아가 그들의 삶에 참여하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9) 천병욱은 “영성은 성육신에 근거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현상으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으로 세상 안에서 하나님께 대한 응답으로서, 교회의 사명을 완성하는 것이다.”라고 정의 하였다.

10) 황화자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사랑(요3:16)인 고로 기독교 영성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힌 바되어 그 넓고 깊고 높은 그리고 긴 그의 사랑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 구체화하면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길(행9:12)을 부단히 추구하여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사는 삶의 과정이다. 이러한 삶의 과정은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그리스동 안에(in Christ),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for Christ) 사는 삶이다.”라고 말한다.

11) 한성기는 “인간 속에 이루어지는 어떤 성품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의과정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삶과 인격으로 닮아가는 과정”으로 보았다.

12) 영성의 역사를 연구한 브레들리 P. 홀트(Bradley P. Holt)는 “영성이란 특별한 형태의 기독교 제자도를 말한다”라고 제시한다.

13) 메조리 J. 톰슨(Marjorie J. Thomson)은 “영성이란 영성생활을 할수 있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서 응답할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능력으로 좀더 실제적인 의미로 영성이란 이런 영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영성은 우리들에게 신앙을 선택하게 하고, 가치 있는 일에 전녀하게 하며, 삶의 방식을 결정하고 신앙을 실첨하게 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형성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영성연구에 있어서 드러나는 분명한 사실은 영성이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환경과 영향들과 관계를 가지면서 경험되어 진다는 사실들이다.

이러한 견해들을 종합해 볼 때, 일부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성령의 은사를 실천하는 신비적인 일이라고 보고, 다른 부류에서는 건전한 교리를 통하여 자아를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하고, 또 다른 무리들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김재성 교수는 이러한 영성의 다양한 정의를 “초월적 차원에 대한 열린 마음(openness to the transcendent dimension), 궁극적 실재에 대한 체험(the experience of ultimate reality),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한 실제적 경험(the lived experience of Christian belief)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의 총제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용어인 영성은 개혁주의 입장의 ”경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영성’이 개혁주의 신학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신학과 영성

a. 신학의 객관적 원리와 주관적 원리

신학의 목적은 성경을 통해서 주시는 복음의 내용 즉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여 그들이 구원에 관한 진리를 깨달아 그 진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데 있다. 따라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직접적 사역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성경을 객관적 원리로 보고, 신앙을 그 주관적 원리로 본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습득함에 있어 이성은 하나의 수단으로 쓰여질 수 있으나 결코 원리는 될 수 없다. 더군다나 이성이 판단의 기준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로 이성을 거슬러 가면서 다만 신앙으로 신학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학작업이나 목회 역시 신앙이 전제되지 않는 다면그것은 공허한 행위에 불과하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을 계시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그 믿음을 말한다.

결국 ‘계시의존신앙’(啓示依存信仰)이 아니고서는 참된 신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이 함께 역사하는 내적 신앙으로 성경계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만이 오늘의 신학과 교회가 살 수 있는 길이라고 할수 있다.

 

b. 신학과 영성의 관계

영성은 신학과 대조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카톨릭 교회는 수도원 운동과 중세를 거치면서 신비신학이 역사의 변천과정 속에서 수정 보완되어 영성신학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개신교 전통에서는 영성신학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할 뿐 아니라 신학과 영성을 합성하는데 대체로 회의적이었다. 왜냐하면 신학은 지적 훈련으로 하나의 학문이며 하나의 연구 과정인 반면에 영성은 인간의 삶의 질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것은 감정과 의지에 더 많은 관심과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영성을 말할 때 우선적으로 신비주의에 몰두한 자나 아니면 지나친 경건주의 자를 연상한다.

그러나 지적 훈련으로서의 신학은 영성과 대조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학과 영성은 하나님을 찾는 서로다른 길일 뿐 그 목표가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학문과 경건이라는 말로 영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논문>

개혁주의 영성에 관한 연구

― 영성 : 어제와 오늘, 내일을 위한 개혁주의 세계관

 A study on Reformed Spirituality

- Spirituality : Yesterday and Today, Reformed Worldview for Futu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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