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교회영성묵상

바울의 헌금관

공격이 2007. 11. 14. 09:52

바울의 물질관

 

  현대 교회의 문제에 조명(照明)을 줄만한 신약 성서의 헌금에 관한 기록은 사도 바울의 서신중에 산발적으로 조금씩 기록되어 있고, 그의 선교 활동을 역사적으로 서술한 사도행전에 바울의 헌금에 대한 가르침과 모금하는 이유가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記述)이 결코 어떤 교회 운영의 요건으로서의 헌금의 법규 역할을 할 수는 없다. 다만, 쓰여져 있는 범위 안에서 그가 각출하고 또 사용하려고 하는 목표와 정신을 찾는 것으로 충분하다. 바울은 결코 어느 만큼 그리스도인이 그의 생활에서 교회 운영을 위해 내야 하는지 또 교직자에게 그것을 얼마나 지불하고 또 여러 모양으로 사용하는데 가져야할 주의사항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구약 성서의 전통 안에 있기 때문에 제사드리는 심정과 십일조를 바치는 이유 등은 충분히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헌금을 율법적인 법규로서 제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의 헌금관을 찾아내기 위하여 성서 안의 짧은 기술에서 배후의 역사를 재조명하여 본문의 주석(註釋)을 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그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헌금을 갹출(醵出)하였으며 또 이를 장려하고 칭찬하였다는 것이다.

 

(1)분명한 목적지향적 헌금(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 갹출)

바울의 복음 선교에 끊임없이 따라다닌 사실 하나가 있다. 그것은 복음의 본질 규명이나 이교도를 교회 안에 맞아들이며 선교 교회를 형성해 가는 일 못지않게 선교의 정신과 결부된 일로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이방 교회에서 모금하는 일이었다. 초대 교회는 이 일을 후대교회의 모범으로서 교회 상호 간에 부조하는 미덕으로 가르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튀빙겐 학파는 이 헌금을 원시 교회안의 논쟁과 결부시켰다.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는 의견 대립이 있었는데, 로마서 15장 30절 이하에 의한 헌금의 예루살렘 전달이 그 교회 안의 유대주의자들을 적지 않게 자극할 것으로 예상, 이 같은 관점에서 이 헌금의 역할을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견해를 수긍할 수 없게 하는 것이 갈라디아서 2장 10절의 구절인데, 이에 따르면 이 헌금은 예루살렘 회의의 제안에서 시작된 것이며, 바울의 선수(先手)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이다.

후에 칼 홀은 바울과 원 교회 간에 교회관의 대립이 있었던 것이 헌금 문제로 드러났다고 보았다. 그래서 바울의 헌금의 문제를 예루살렘과 관련시켰으며, 이 헌금의 일종의 성전세와 같은 것이었다고 하였다. 슐라터는 예루살렘의 구원사적 의미와 예루살렘 교회가 원시 기독교에서 가진 지위가 작용하여 바울로 하여금 이 헌금에 힘쓰게 했다고 한다. 이러한 논쟁을 거쳐 오늘날에는 바울의 서신의 본문 석의(釋義)에 집중하게 되었다. 바울이 이 문제에 언급할 때에 선교 교회들의 이름을 열거하였고, 그들에게 파견한 조수들의 이름이나 시기들을 언급했기 때문에 그의 선교의 발자취와 신학적 사상의 변화 등을 그 언급에서 간취(看取)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다각적인 측면에서 연구되어진다.

사도행전(11:27~30)에 의하면, 예루살렘 교회의 구호 상업은 사도회의(15장) 이전에 이루어졌다. 그때에는 세계에 큰 기근(饑饉)이 있어 특히 예루살렘 교회의 궁핍 때문에 안디욱 교회가 주동하여 헌금을 모금해 전달하였다. 이것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은 신자들에게서 움직인 사랑의 표현이다. 예루살렘 회의는 바리새파와 그리스도인이라는 그룹이 생겨서 예루살렘에 문제가 일어나 안디옥에까지 파급되었기 때문에 소집되고,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 선교사로 참석하였다. 갈라디아서 2장의 기사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 15장의 사도총회에 해당한 바울의 기술(記述)로 보아야 하겠다.

바울은 여기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된 것은 “계시”에 의해서 된 것이라고 한다. 갈라디아서에는 논쟁적 기분이 넘치며, 1장13절 이하의 자서전적 기술에도 반대자들을 겨냥한 논쟁적 의도가 보인다. 바울의 진술에 의하면, 예루살렘 회의의 결과는 선교 분야를 분할함으로써 원(原)교회가 실질적으로는 두 초점을 가진 타원 격으로 되었다. 따라서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울의 사도권과 이방 선교의 정당성이 확인된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초두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중요하다는 사람들”에게 이방 선교에 대하여 설명하게 된 것은 자신이 “달리고 있는 것과 이미 달린 것”이라 허사가 되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곧 소신대로 이방 세계로 달리며 이방인을 그리스도 편에 획득하고 교회를 세운 것을 의미한다.

 

이 회의를 통하여 첫째, 이방 교회의 자립성을 인정받았다. 기독교를 이분하는 일없이 선교 분야의 분할로 낙착되었다. 그것은 선교 지역을 팔레스틴과 지중해 지역으로 나눈 것이 아니고, 할례 받은 자 선교와 무할례자 선교로 나누었다. 이것은 사람의 부류를 단지 나눈 것이 아니고, 선교 원칙으로서 율법 없이 구원받은 것을 하나의 선교 방법으로 인정하는 일이다. 이같이 원 사도들과 바울의 진영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고, 서로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다.

둘째, 이 회의는 예루살렘 교회를 존중하는 표시로서 이방 교회의 헌금을 요청하게 되었다. “한 가지 그들이 우리에게 요구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10절)이었다. 여기서의 “가난한 사람”은 예루살렘 신도의 별칭같이 들리며, “기억해 달라”는 말은 고난 받는 신도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뜻으로 빈번히 사용되었다(살전1:3; 히 13:7). 예루살렘 교회는 현재의 고난뿐만 아니라 과거의 그리스도의 고난을 짊어지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이같이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 달라는 총회의 요청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우의를 인정하라는 조치가 아니라, 두 원칙을 지닌 원교회의 선교에서 교회의 일치를 중요시하기 위한 것과 원 교회의 종말론적 신앙을 고백하는 기회로써 의미가 있다. 이 같은 헌금 요청은 원 교회의 단순한 사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종말론적 신앙의 확증이요 교회 일치를 위한 중대사였다. 이방인은 이 일을 통하여 기독교를 치열하게 반대하던 유대인을 형제로 용납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참여하고, 유대인은 이방인을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의 업적을 찬양하고, 그들과 함께 종말론적 예배에 참여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살전 2:14-16).

 

갈라디아서의 문맥에서 더 고찰할 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을 구원사적 맥락에서 존중한다든지, 거기의 사도들의 우위를 인정했는가 하는 점이다. 4장21-31절에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과 땅의 예루살렘’의 비유에서 땅의 그것은 종의 자녀를 낳는 곳이고, 하늘의 그것이라야 영적 능력으로 인간을 해방한다고 보는 관점을 감안하면 헌금은 결코 성전세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총회가 그같이 요청했으나 바울 편에서는 자기가 “이미 열심히 행해 오던 일”이었다고 하는 만큼, 그의 선교 활동에 반드시 동반할 중요한 사실임에 틀림없다. 사도행전 11장29-30절의 기근구호 방문을 생각할 수 있으나 헌금은 단순한 “사랑의 희사(喜捨)”가 아니라 그의 이방(異邦) 선교의 원리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서 선교에 동반했다.

 

(2)헌금의 신학

①거룩한 모금

고린도 전서 15장 1절에 이미 갈라디아 여러 교회에 헌금을 지시한 것과 같이 고린도 교회에서도 실시해야겠다고 선언된다. 갈라디아서에서 총회의 위임으로 헌금의 청탁을 받았던 것을 말함으로써 그것을 호소했으나 조금 침체했던 것 같다. 이제 고린도 교회가 여러 파벌 때문에 대립과 분열로 어수선할 때에 바울은 헌금을 모금하였다. 갈라디아서의 집필 시기는 아직 학자들 사이에 공통된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으나 흔히 고린도 후서의 다음이요 로마서 집필 직전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갈라디아서를 보낸 후에 헌금을 독려했다면 고린도전서 16장은 그 후에 쓴 것이 되어야 하겠는데, 이 때문에 이치에 잘 맞지 않는다. 고린도전서도 한 번에 쓴 단일한 글이라고 인정 못 받기도 하는데, 여하간 16장을 쓰기 휠씬 전에 갈라디아서는 집필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에게는 “유대주의자”라는 대적자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모금을 권유하는데 문제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고린도전서의 경우에도 성령주의자나 영적주의자들의 바울에 대한 배격이 심하고, 바울 일행의 부양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이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모금하는 것은 많은 난관에 직면했을 것이다. 헌금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고린도전서에는 없다. 방문 예정의 뜻과 계획을 말하는 동시에 헌금을 말함으로써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활동 자체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선교사 바울의 그곳 유숙과 선교 행각을 고린도인들이 책임질 것을 암시한다. logeia는 logeuein(줍다, 모집하다)이라는 동사에서 온 말로서, 이것을 명할 때에 바울은 결코 한 제도로써 영구히 존속할 것으로 하지 않고, 단 한 번의 사업으로서 유럽 선교를 결산하는 일 가운데 하나로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는(2:10) “가난한 자”를 상대로 했지만 여기서는 “성도들”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또 그것은 “선물”이다. 곧 이방 교회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에 가져 갈 “호의”의 선물이다. 그것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실존을 반성하면서 감사함으로 보내는 선물이며, 결코 구제금이나 의연금처럼 자신의 자랑을 담지 않는다.

 

대적자들의 공격 대상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헌금하도록 명하고, 먼저 디모데를 보내서 교회의 문제나 헌금에 관한 일을 위해 힘쓰도록 하면서 자신의 계획을 말한다(고전16:5~). 그는 마게도니아에는 그저 거쳐 갈 뿐이고 머물지 않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계획이 변경되었다(고후 2:15~). 바울 편에서는 아시아에서 큰 환란을 겪었는데, 이것은 에베소서에서 된 일과 같다. 그 일행은 살 희망조차 버리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서(고후 1;9) 그 죽음의 고개를 넘겼다. 거기서 얻은 확신은 “인간적 지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고후 1:12)로 솔직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제일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우선 그들에게 가서 두 번째의 은혜를 나누고, 그 후 마게도니아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들에게 들러 그들의 도움을 얻어 유대로 갈 계획이었다”(고후 1:15~16). 여기 “두 번째의 은혜”는 두 번째의 모금 여행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고린도전서 16장 3절에서는 헌금을 “호의” 또는 “은혜”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은혜의 기회이다. 그러나 바울은 첫 계획을 변경했다. 거기에는 고린도 교회 편에 큰 이유가 있었는데, 디도의 방문 후 얼마 되지 않아 고린도에는 바울이 세운 계획과 어긋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또 거기서 마게도니아로, 또 다시 고리도에 왔다가 그의 마지막 행선지인 예루살렘으로 갈 계획을 순조롭게 수행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고린도에는 다시 바울에 대한 반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공평의 원리

이미 언급한 대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고린도로 가서 겨울을 지내라고 통고하고, 도중에 마게도니아를 거쳐 가려고 하였다(고전 16:5~9). 그러나 어떤 이유로 인하여 바울은 드로아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선교의 열린 문을 보았다. 그러나 고린도로 보낸 디도가 오지 않아 불안해하며 마게도니아로 건너갔다(고후 2:12~13). 이 서술은 7장 5절로 이어진다. 그들은 마게도니아에 이르렀을 때에도 전혀 휴식이 없고, 가는 곳마다 여러 가지 환란을 당했다. 밖에는 싸움이 있고, 안으로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근심에 둘려 있는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디도를 다시 돌려주심으로 위로해 주셨다. 그동안 디도는 고린도에 침투한 외래적 선동자들과 개인 접촉을 벌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고린도 교회의 평화를 위하여 매진하였을 것이다. 그의 체제 말기에도 아마 선동자회의 평화를 위해 진력하였을 것이다. 그의 체제 말기에 그 선동자들은 고린도를 떠난 듯하다. 곧 “그가 여러분에게서 받은 위로가 우리(바울 일행)에게도 위로가 되었다”(고후 7:7)라고 하는 것을 보아 그같이 추측된다. 마게도니아 체제의 결산은 “기쁨에 넘친” 것으로 끝났는데(고후 8:2), 여기서 헌금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3)축복의 동기로 된 선물

고린도후서 9장은 8장과는 차별적으로 씌어 진 글로 보인다. 여기서는 그 모금이 바울의 권면에 의해 되었다고 강조된다. 헌금은 “섬김”이라고 불리어 진다. 이 글은 “아가야”를 자주 말하는데, 고린도라는 말 대신에 “아가야”가 자주 거론된다. 마치 마게도니아에서 쓰고 있는 듯이 ‘아가야’ 지방의 형제들의 믿음을 마게도니아 사람들에게 자랑했다고 한다. 1절에서는 diakonnal이라 부르고, diakonnal이라 부르고, 5절에서는 eulogia(선물축복)라고 부른다. 6절의 번역은 원문대로 한다면 “아까워 하면서 뿌리는 자는 아까워하면서(인색한 기분으로) 거두고, 축복으로 심는 자는 축복으로(찬양으로) 거둔다”이다. 우리 새 번역 신약은 “적게 뿌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자는 많이 거둡니다”고 되어 있다. eulogia는 16장 1절과 3절에서 헌금이 logeia와 charis로 합쳐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성도들의 궁핍을 돕는다는 말이 없이 그들을 섬기는 예물로써 드리는 것이라고

한다.

①영적 빚에 대한 물질적 상환

로마서 15장(22절 이하)에서 바울은 열성있게 호소하고, 유럽과 아시아의 각처에서 모금한 예루살렘을 위한 헌금을 가지고 이제 상경한다는 사정을 공표한다. 바울의 마음은 속히 세계의 수도인 로마에 가서 형제들을 만나기를 소원하지만 먼저 지금까지 이방(異邦) 교회에게 호소하고 모금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그를 재촉하였다. 사도행전(29:3~6)에는 이 길에 동반한 이방 교회의 대표들의 이름이 열거되었다.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중에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 사람 가이오와 디모데 그리고 아시아 사람 두기오와 드로비모”였다. 바울의 상경은 종말론적인 대행진이다. 사도행전(24:17)에 의하면, 그는 “내 민족에게 전달할 구제금과 하나님께 바칠 제물을 가지고 고국에 돌아왔다”고 한다. 후기 유대교가 기대했던 이방 사람들의 성전순례가 실현된다. 바울은 구제금 외에 “하나님께 바칠 제물”을 가지고 왔다. 이 제물은 이방인들의 대표들을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보답의 제물로 성전 제단에 바칠 생각인지도 모르는 매우 비장한 여행이다.

②선교 동참의 헌금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에서 사도의 심한 곤경 속에 빌립보 교인들이 보낸 선물에 대하여 언급한다. 앞에서 고찰한 고린도 후서,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헌금의 지시를 이미 했던 것을 상기시키며,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아가야 지방 사람들이 1년 전부터 갹출(醵出)하여 적립하고 있다고 자랑했던 것을 상기시킨다(고후 9:1-5). 또 마게니아 교인들이 모범적으로 헌금을 “가난한 밑바닥에서도 마음이 넉넉하여 아낌없이 구제하게 되었다”고 상기시킨다(고후 8:1-2). 이것은 빌립보교회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헌금에 참여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빌립보 서신에는 이에 대한 언급 보다는 옥중에 있는 바울을 위한 그들의 위문금에 대해서 언급한다. 사실, 바울은 유럽 선교의 절정에 고린도 교회 안의 분쟁과 바울에 대한 반대 때문에 어두운 위험의 그림자를 느낄 무렵, 빌립보 교회는 그에게 따뜻한 온정을 보냈다. 예루살렘을 위한 모금의 계획이나 결과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 서신은 조금 일찍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빌립보 교회에도 바울의 복음을 왜곡시키며 그를 헐뜯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은 비록 자신의 옥중에서의 승리 개가(凱歌)와 그리스도찬가(2:6-11)등을 보내면서도 그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빌립보 교인들의 선물은 주로 사도의 선교 생활을 위한 부양에 관계되어 있다. 그 부양을 위한 헌금이 고린도후서에서 대적자의 의심과 비난을 샀을 때의 부양 문제와 같지 않고, 바울의 고난의 깊이에 찾아준 위문이자 하나님께 바치는 “희생제물”(4:18)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선물의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었고, 그들에게 “나(바울)와 고난을 같이 하면서 잘 견뎌주었다”는 표시이다(4:11). 바울은 그들에게 바울의 복음 운동 초창기에 그가 마게도니아를 떠날 때에 그들이 “주고 받는 일”(4:15)로 그에게 협력한 일을 상기시킨다.

또 하나의 주목할 표현은 “아름다운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제물”(4:18)이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향기”의 동기를 인간의 행위에 적용한 첫 예는 시락서(집회서=외경) 39장 13절이다. 이것은 제사언어로써 구약시대부터 사용되었고, 후기 유대교에서도 비유적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혼합주의적 신비종교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였다. 바울은 이 말을 쓰면서 그 선물을 하나님 앞에서 그에 의하여 또 그에게 드리는 것으로서 받음을 표시한다. 이스라엘의 예배공동체는 제사를 잊을 수 없었고, 사람의 정성어린 예배 행위를 제사에 비교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헌금도 제사의 향기에 비유한 것이다. 따라서 빌립보서 4장 10-20절의 주제는 헌금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이치에 대한 범례적 구절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빌립보서 1장 1절에 “감독들과 집사들”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후시대의 카톨릭 교회의 감독제의 기원을 설명하는 구절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가 일찍부터 교회 내의 행정과 경제적 부서를 맡은 사람들을 두어 다른 교회나 사도들을 위하여 헌금 사항을 맡긴 것을 가르쳐 주는 구절이다.

이렇게 사도의 선교 활동에 동참하고, 기독교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을 복음의 본질에 속한 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 정신이요 아울러 사도 바울의 헌금관이요 재정관이었다. 이러한 일은 그들이 결코 부유해서가 아니라 바울의 말대로 “그들은 큰 환란 가운데서 시련을 받으면서도 기쁨이 넘쳐 가난의 밑바닥에서도 마음이 넉넉하여 아낌없이 구제하게 되었다”(고후 8:2)는 그 것이다.

이렇게 성경적인 관점에서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듯이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고 비록 가난하여도 힘에 넘치도록 하나님을 향하여 복음을 위하여 헌금을 드리는 것이 개혁주의적 재정론이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특별히 교회 내에 감독들이나 집사들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교회의 제반 경제적인 사무를 맡기며, 사도들은 가르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만 전심을 다하는 이것이 개혁주의적 재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박우용. 「현대교회와 교회재정」, (서울;하늘기획, 2000 ), pp. 189-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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