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교회영성묵상

[스크랩]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퍼온글)

공격이 2013. 10. 13. 09:19
(이 사랑방의 문패가 아굴라와 브리스가인데 그 가정을 주제로 한 말씀이 있어 함께 나룰려고 퍼 올립니다. 말씀하신 목사님 성함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본문 : 행18:2, 18, 26

Ⅰ. 들어가는 말

현대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주저없이 이것을 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현대 사회와 이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너무나 작다는 점입니다.

한국 교회의 경우는 이것이 너무나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금보다 그 숫자가 훨씬 적었던 구한말에 한국 교회는 사실상 한 사회의 변혁을 주도할 만큼 강력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날 전체 인구의 25퍼센트까지 차지하는 그 많은 그리스도인의 숫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 주변의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원인이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부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초대 교회의 영광과 능력과 권위는 초대 교회 교인들의 헌신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문자 그대로 절대적인 헌신이었습니다. 본문에는 그런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모습, 특별히 헌신된 부부 상(像)이 그려져 있습니다. 남편의 이름이 아굴라이고, 아내의 이름은 브리스가 혹은 브리스길라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서로 다른 환경 속에 살았던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이룹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룬 가정에서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고 같은 세계관을 견지하면서 서로를 존중해 주는 가정이 있는가하면, 날마다 서로의 입장만을 고수하면서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자녀를 낳고 살면서도 여전히 갈등의 폭을 키워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는 이혼률이 대단히 급증하고 있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결혼에 대한 인스턴트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좀더 신중하고 깊이 생각해서 배우자를 선택하는 사려 깊음이 사라지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브르스가, 혹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아름다운 모습을 만납니다. 바울의 삶이 아름다웠던 것처럼 이들 부부의 헌신은 아름답고 힘이 있습니다. 함께 이들 부부의 모습을 살펴 가시는 가운데 다시금 우리의 부부관계를 점검하고 헌신을 점검하시는 소중한 시간이기를 원합니다.

Ⅱ. 본문 관찰

1. 부부 상호간의 헌신

우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 있어서 두드러지는 점은 항상 이들의 이름이 언급될 때는 함께 언급이 된다는 점입니다. 쉽게 말해서 바늘 가는 데 실이 있었던 것이지요.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서로에게 대한 아낌과 신뢰, 그리고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부부 생활의 비극은 많은 부부들이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아니 한 침상을 사용하면서도 같은 세계를 공유하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항상 함께 고난의 격랑을 헤쳐 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행18:2절에 의하면 그들이 로마를 떠나 고린도로 이사온 부부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1절 이하를 보십시오.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1,2절).

바울은 고린도에 갔을 때 아굴라 부부를 만납니다. 이 때 바울은 상당한 영적인 침체를 경험하고 있을 즈음이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유대인 말살 정책을 폈던 로마의 황제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글라우디오 때문에 정든 고향과 집을 버리고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글라우디오 황제는 유대인 남자들은 다 쫓아냈지만 여자들은 원하면 로마에 남을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했는가 하면 유대 여자들을 노예로 혹은 노리개로 부려먹기 위한 간교한 정책이었다는 것입니다.

로마 정부에서는 여자들이 남게 되면 대우를 해 주겠다고 말했지만, 대부분의 유대여자들은 이 특권을 거절하고 자기의 사랑하는 남편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떠나갔습니다.

여러분! 행17:4절에서 적지 않은 귀부인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유대인 여성들은 정결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유대인 아내들은 남편에게 성실했습니다. 가정에 대한 유대 여인들의 철저한 헌신의 정신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가정은 지켜져야 할 마지막 보루입니다. 가정이 깨진다는 것은 사회가 깨지는 것이고 교회가 깨지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인류의 질서가 깨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언약 사상에 기초하여 남편과 아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배우자를 언약의 남편 혹은 언약의 아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결혼을 단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약속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피로 맺어진 약속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둘 사이에는 아무도 끼어 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부부가 서로 불신함으로써 가정이 깨어지는 요란한 현대사회와 비교해 볼 때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오늘날 부부 한쪽의 불성실 때문에 깨어져 나가는 가정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은 한국 사회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99년 8월 2일자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혼 인구 1000명당 2건 .... 불란서, 일본 앞질러』라는 타이틀의 기사였습니다. 미국 4.3, 호주 2.9, 독일 2.1을 이어서 한국 2.0입니다. 당당하게(???) 4위에 랭크된 것입니다. 세상에 앞지를게 없어서 이혼율로 앞질러갑니까? 그리고 이러한 이혼과 이 시대의 잘못된 성의식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미국에서의 일입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이 수상해 보여서 이런 시험을 해 보았다고 합니다.

"여보, 내가 죽으면 당신 재혼할 거예요?"

남편이 대답합니다. 『그야 내 나이가 아직도 젊으니까 할 수 없이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소』

아내가 이해하겠다고 말한 뒤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집니다.

"혹시 내가 죽는다면 내가 타던 자동차도 당신의 새 여자에게 타게 할 거예요 ? "

그러니까 남편은 차가 아직 괜찮은데 어쩔 수 있겠느냐면서 타게 해야 할 것 같다고 대답을 합니다. 아내는 이해할 수 있다면서 또 한 가지 질문을 더 합니다.

"그러면 내가 죽은 다음에 내가 이용하던 골프 클럽(club )도 쓰게 할 거예요 ? "

남편은 갑자기 그것은 안 될 거라고 하면서 그 여자가 왼손잡이라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 여자가 누구입니까?

남편과 아내가 서로 심각하게 불신하고 그것 때문에 수많은 가정들이 깨어지는 이러한 시대에 고난의 파도를 헤치면서 함께 나란히 삶을 걸어가고 있는 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모습은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이들 부부는 적어도 네 번 이상 주거지를 옮겨 다녔습니다. 본도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고린도로,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에베소에서 다시 로마로 갔던 것입니다. 한 번만 이사를 해도 힘들고 지겨운데, 이 정도로 주거지를 옮기면서 그들은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경험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럴수록 더욱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본문에서 그들은 고린도에 왔을 때 함께 사업을 벌입니다. 천막 업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바울이 천막을 기웠기 때문에, 이 부부와 바울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한 문서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우리 중에 가장 으뜸되는 부부의 이상형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신약성경에 이 부부에 대한 언급이 여섯 번 기록되는데, 그 중 네 번은 부인의 이름이 먼저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보통 남편의 이름을 먼저 기록하는 법인데, 부인의 이름이 먼저 나온 것은 아마도 그녀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두드러질 정도로 활동적이고 헌신적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활동적인 여인의 헌신을 볼 때, 우리는 그 여인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도 부인의 활동을 이해하고 함께 삶을 나누었던 남편의 이해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외조의 공이 컸던 그런 부부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성경에서 이 부부의 기록을 읽을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아주 흐뭇해집니다. 복음의 아름다운 사역이 이루어지는 곳에 나란히 등장하고 있었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부부, 그들은 서로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승화시켜 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부 관계는 중요합니다. 얼마나 서로를 배려해 주고 얼마나 서로를 아껴주시고 계십니까? 같은 생각을 가져 보려고 노력하십니까? 같이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같은 취미 생활을 개발하고 그렇게 형성된 에너지를 주님을 위해서 사용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가정도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가정과 같은 이상적인 부부상을 만들어 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2. 말씀에 대한 헌신

본문 24절에는 보면 아볼로라는 인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아볼로라는 사람은 학문과 성경에 능한 자라고 기록합니다. 다음 주에 저희가 함께 살피겠습니다만 성경은 아볼로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道)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24,25절).

비록 요한의 세례만 아는 아볼로 였지만 그는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아볼로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논리적이었고 성경적이었으며 웅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부는 아볼로라는 청년의 설교에는 가장 중요한 복음적 요소가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직 주님을 통해서 새로워진다는 삶의 영역을 충분히 모르고 있었던 이 젊은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들은 "저 청년이 이 점만 알면 얼마나 더 귀하게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겠는가'라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아굴라 부부는 설교를 들으면서 그 설교에 가장 중요한 핵심이 빠져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해 낼 수 있는 성경 실력이 있었던 부부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부부는 자기들의 성경 실력으로 남을 부끄럽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온유하고 은밀하게 아볼로를 불렀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그들은 아볼로라는 청년을 불러 함께 말씀의 교제를 나누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변화될 누 있는 삶의 위대한 가능성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아볼로가 온전한 설교자가 되어 활동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27-28절에 실려있습니다.

성경에는 아굴라 부부가 설교했다는 흔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평신도로서 설교자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강단이 권위가 없어지고 목사님들의 메세지가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분적인 책임은 평신도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책임하고 근거 없는 풍유적인 말씀이 난무해도 잘못된 은혜관 때문에 그것을 무조건 은혜로 아멘하는 것은 서로를 죽이는 일입니다. 잘 분별할 수 있는 성경적인 안목, 성경적인 실력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이단 사설을 들어도 아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굴라 부부는 어떻게 말씀의 무장을 해 나갔을까요? 참으로 감사한 것은 바울이 영적인 침체를 경험하더 시절 이들이 함께 했으며 고린도에서의 1년 6개월 동안 바울 가까이서 말씀을 배웠다는 것에 있습니다.

본문에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말씀을 배웠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계속해서 바울과 이들 부부가 함께 있었다면 이들은 공적인 시간과 생활 속에서 모두 말씀을 배울 수 있는 특권을 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지식으로서만 간직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헌신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놀라운 능력과 권위는 바로 말씀에 대한 성도들의 헌신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초대 교회는 말씀으로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직분을 수여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너무도 쉽게 직분을 수여하는 일종의 매관매직의 풍토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희도 지금 일꾼을 세우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꾼을 세우는 일은 그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위치와 신앙 생활의 경력으로 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그가 얼마나 말씀에 헌신하고 권위에 순종하는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말 그대로 순서대로하지 않으면 그것이 시험이 됩니다. 나이 순으로 하지 않으면 그것이 시험이 됩니다. 나이 젊어도 그리스도를 향한, 말씀을 향한 타는 듯한 헌신이 있는 사람이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 적당한 사람, 구원의 확신조차도 없이 신앙의 년 수만 긴 사람을 세워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렇게 사분오열되고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일꾼으로 세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굴라 부부는 먼저 바을 사도를 통해서 1년 6개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훈련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래 주일 아침에 반짝하는 예배 외에 말씀을 배우기 위해서 시간을 내고 그 말씀에 헌신해 본 기억이 있으십니까? 성경 전체를 통시적인 시각으로 보기 위해서 노력하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런 노력이 없이는 날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한 채 무기력한 모습만 보이는 원인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힘은 이 말씀에 대한 철저한 헌신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아굴라 부부는 이러한 면에서 우리에게 크나큰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말씀을 배우기 이해서 시간을 내고 마음을 쓰는 것은 곧 우리의 영적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에 대한 헌신이 있는 사람들이 다른 부분에서도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교회와 교회 지도자에 대한 헌신

마지막으로 이들의 놀라운 모습은 지도자를 향한 그들의 끊임없는 헌신입니다. 사도행전에는 하나님 나라의 꿈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뛰고 일하고 호흡했습니다. 그들이 교회 앞에 충성했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 조직에 헌신했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였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사역자들은 이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도구였기 때문에, 초대 교회 성도들은 단순히 교회 조직이나 인간에 대한 아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주께서 세우신 교회와 그 지도자들을 도우며 세계 선교에의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굴라 부부의 마음속에는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리고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와 주님의 사역자들을 철저하게 섬겨야 한다는 의식이 깊이 박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18절 이하를 보면 바울이 1년 6개월 이상 고린도에서 사역한 후에 그 도시를 떠나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18,19절).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갈 때 누가 함께 가고 있습니까? 아굴라 부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동행이 아니었습니다. 아예 이사를 가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한다고 하니까 이들 부부는 에베소의 복음화를 위해서 함께 가겠다고 자처하고 사업을 정리한 것입니다. 요즘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까? 저는 이것이 지도자를 향한 이들의 신뢰였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을 향한 이들의 헌신이요, 신뢰였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에베소에서 한동안 사역한 후에 에베소를 떠나갑니다. 이제 아굴라 부부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까? 고전16:19절에 보면 바울이 로마로부터 고린도 교회를 항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괄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主)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그럽니다.



이때 아굴라 부부는 다시 로마로 이사한 후였습니다. 이들 부부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은 후에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의 복음화를 포기할 수 없어서 다시 로마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교회를 일구어 내었습니다. 그들이 가정을 Open하고 가정 교회를 이룬 것입니다.

뒷날 사도 바울은 이들의 헌신을 이렇게 말합니다. 롬16:3절 이하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 에게 문안하라" 바울은 지금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함께 복음을 위해서 신실하게 일하는 나의 동역자 아굴라와 브리스가. "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4절).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을 내어놓았다고 말합니다. 오늘 얼마나 많은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바울과 같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과연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성도들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라고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나에게 이런 동역자가 있는가 반문해 보았습니다.

바울의 곁에는 자기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목숨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의식, 이것은 초대 교회의 놀라운 하나됨의 정신이었습니다.

바울이 바울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애정을 가진 성도들이 주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섬김의 정신을 가지고 지원했기 때문체 바울의 세계 선교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그러한 모습은 요즘의 교역자와 평신도 지도자간의 관계와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많은 목사님들이 목회에서 가장 부담되는 것이 당회에서의 장로들과의 관계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서로 도와야 하는 동역자의 관계가 서로를 불편하게 하고 목회자로 하여금 나래를 펴고 열심히 일할 수 없도록 하는 암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것 또한 한국 교회의 잘못된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것일 것입니다. 잘못된 권위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형제를 권면하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지혜가 아니라 장로와 목사가 함께 같은 장로라고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목회자가 하고자 하는 일을 그것이 비진리가 아닌 다음에야 존중해 주는 것이 서로를 위해서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1세기의 교회가 그 당시의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울 혼자의 힘이 아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바울의 뒤에 있었던 수많은 평신도 지도자들의 절대적인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당당하게 세계를 향해 도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Ⅲ.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아굴라와브리스가 부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아름다운 부부상에서, 말씀에 대한 헌신에서, 지도자를 향한 끊임없는 존경과 사랑에서 말입니다. 모쪼록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들과 같은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실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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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아굴라와 브리스가
글쓴이 : 아굴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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