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달에
새로운 맘을 가지고
기도의 응답을 바라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가정과 가족을 위하여
뜨겁게 기돟여 응답받기를 원합니다.
새 지도자를 위한 기도
민수기 27:12∼23
교회나 국가와 같은 단체에서 지도자의 위치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누가 지도자가 되느냐에 따라서 동일한 재원(財源)과 인력으로도 그 결과가 판이한 것을 우리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이순신 장군의 일화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본영에 주둔하고 있을 때 왜장 고니시는 가토 장군이 울산에 상륙한다는 날짜를 적은 밀서를 조선측에 보냅니다. 이에 고무된 조정은 군사를 출동시키라고 명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신중론으로 기다립니다. 그런데 정말 가토가 예정된 날짜에 울산으로 상륙하자 평소 장군을 시기하던 윤두수, 김응남 등에 의해 그는 파직을 당하게 되고 죄인의 몸으로 한양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온갖 고문과 추궁을 당하고 겨우 백의종군을 명령받아 28일 만에 옥중생활에서 풀려났는데, 그 사이 어머니 변씨는 마음의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한편 이순신의 뒤를 이어 수군 통제사가 된 원균 장군의 군대는 칠천양 싸움에서 왜군의 유인전술에 넘어가 2백여 척의 함대가 산산조각이 나고, 원균 자신도 거제도에서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다급해진 조정은 다시 이순신 장군을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재임명하여 싸우게 했습니다. 이때 남아 있는 배는 경우 12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이 있사오니"라는 장계를 올리고 1차로 어란포 싸움에서 적선 13척을 격퇴시킨 후, 2차로 울돌목에서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단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격파한 명랑대첩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조선 수군은 다시 바다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지도자의 중요성을 얼마나 생각하며 살고 계십니까? 중국의「삼국지」에서 촉나라 제갈공명의 뛰어남이나, 「초한지」에서 한나라 장량의 지혜와 전술은 지도자의 발휘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다시금 성찰하게 합니다. 이와 같이 현대의 교회와 국가의 지도자도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세의 후계자로 생각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본문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1. 참된 지도자는 자기의 후계자에 대하여 뜨거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한 사람을 회중 위에 세워 목자처럼 출입을 주장하도록 간청했습니다(민 27:15-17). 참된 사역자는 자기 시대 뿐만 아니라 후대를 위해서도 역시 책임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연구한 신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12제자를 양육하는 사역에 자신의 역량의 50%가 넘는 힘을 기울이셨다고 합니다. 그만큼 후계자를 제자로 삼는 일에 힘을 기울이신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 중에서도 어떤 분은 많은 제자들과 동역자들을 양육해서 풍성한 열매를 계속 거두시는 분이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분은 교회성장이나 사역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변변한 제자나 후계자를 양육하지 못하고 쓸쓸한 노후를 맞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제자 삼는 사역을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사명 중의 하나로 인식하고 열심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2. 참된 지도자는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모세의 간구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즉각 응답하시어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일찍이 가나안을 정탐할 때 12명의 정탐꾼 중에서 갈렙과 함께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했던 하나님을 의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민 14:4-10). 또한 현실의 어려움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볼 줄 아는 신앙의 용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가리켜서 "…… 신에 감동된 자니 ……"(18절)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는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군대와 아말렉 군대가 싸울 때 군대의 지도자로서 앞장서서 아말렉을 크게 물리친 바 있습니다(출 17:8-16). 그리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40일 낮밤을 머물 때 시종들며 따르기도 했습니다(출 24:13). 또한 회막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면하실 때는 수종을 들기도 했습니다(출 33:11).
이렇게 여호수아는 늘 모세와 가까이 있으면서 인격적으로 배우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여, 이미 그의 성품과 역량을 드러낸 훌륭한 후계자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대에도 그렇습니다. 학벌이나 뛰어난 재능, 그리고 배경이나 외모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믿음을 소유한 바른 기독교 영성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3. 참된 지도자는 공개적으로 인정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먼저 모세로부터 안수를 받았습니다(18절 하). 이것은 직분을 전해 주는 표시이자,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은사도 받게 하는 방편입니다. 나아가서 여호수아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서 위탁을 받습니다. 이렇게 지도자의 권위는 공식적이어야 합니다. 더욱이 '우림의 판결법', 즉 대제사장의 에봇에 결부되어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데 사용된 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사이비 이단에 속한 사람은 정규 신학대학의 과정을 모두 부인하고, 직통계시와 능력적인 은사를 소유해야 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의사가 되기 위해서 6년간의 공부과정과 인턴·레지던트의 3년 기간, 그리고 전문의사가 되는 시험을 거쳐서야 비로소 자신의 전공이 결정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전문의사가 되는 기간과 과정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는 그만큼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생명보다 더 귀한 영혼의 생명을 살펴야 하는 목회자와 같은 지도자는 훨씬 더 오랜 기간 동안 공식적인 과정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경건과 실력이 겸비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이 주장한 모토(motto)는 "경건과 학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영성과 뛰어난 능력을 병행하여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지도자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한 자연적 지도력과 영적 지도력을 함께 계발해서, 다른 사람에게 바람직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성령충만한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사회의 변화에도 강력히 대응할 수 있는 믿음 있는 지도자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입니다.
생각하고, 활동하고, 기도하라
고린도 전서 14 : 15
Harry Emerson Fosdick
하나님께서 무한히 선하시고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기도 같은 것은 불필요하다는 주장은 두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오류는 기도란 간절히 구함으로 하나님께서 전혀 예정하지도 않고 계시거나 또는 다르게 예정하고 계신 어떤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시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그리고 아마도 수년 동안 우리의 삶을 통해 실천하려고 하였음에도 우리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우리의 이해력이 부족하거나,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어 응답하지 못함으로 실행하지 못하시고 있는 것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감독하고 계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을 감독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 23 : 7).
(2) 진정한 기도는 그것을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이르는 문을 엽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계획을 변화시키지 못하나 하나님의 계획에 출구를 제공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구걸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협력입니다. 대주교 트렌취는 다음과 같은 명확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나님의 뜻을 바꾸려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장 높은 뜻을 파악하는 수단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은 기도를 필요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생각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다른 한가지 오류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그 어떤 도움이 없이도 그가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1) 인간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는 기도하는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그 어떤 일도 하실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러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지극히 대담하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없이는 아무 일도 하실 수 없다."
(2) 얼핏 보아 이 말은 엉터리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많은 방법으로 우리의 협력에 의존해 있는가를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하나님 자신은 인간들이 생각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행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진리를 인간들이 찾지 않고 발견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늘에다 퍼뜨려 놓으시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낙심에 빠져 지적인 수고를 할 때에만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설사 물질 세계에 관한 진리라도 그들에게 계시할 것입니다.
②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활동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리와 터 널을 원하실 때, 그리고 번개가 이용되고 대성당이 건축되기를 원할 때 그는 혼자서 그 일을 하실 것이라고 인간은 말할 것입니까? 그것은 불합리하고 나태한 숙명론에 불과합니다.
③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인간의 생각과 활동에 맡겨 두고 계시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인간의 기도에 맡겨둘 수 없겠습니까? 생각 없이는 그 어떤 일도 행해질 수 없습니다. 활동 없이는 그 어떤 일도 행해질 수 없습니다. 기도 없이는 그 어떤 일도 행해질 수 없습니다.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과 협력하는 세 가지 형태 중의 한 가지입니다.
선행 조건
누가복음 5 : 15-17
Theodore Parker Ferris
1. 오늘 설교는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기도의 세 가지 선행 조건에 관한 것입니다. 기도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기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 할 때의 선행 조건일 뿐만 아니라 모든 우리가 하는 일의 선행 조건입니다.
(1) 기도는 우리가 몹시 원하는 것을 다른 방도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한 방도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기도는 본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흔히 기도의 결과로 무엇을 얻지만 이것은 그들의 기도의 본래의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기도는 우리 자 신이 기분 좋게 만족한 기분이 되는 자기 최면과 같은 종류의 수단도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하면 예전보다 더 차분하고 분별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흔한 일이지만 그것이 우리 기도의 본래의 목적이 아닙니다.
(2)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대화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정신면에 있어서 생각할 줄 알고 계획하며, 이것저것 종합해서 생각하고 결정을 짓고 일을 합니다. 우리는 정신을 지니고 있으며, 의식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정신을 초월하여 또 다른 참 정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정신은 우리가 관심의 대상이 되기 이전에 이미 생각하고 있었으며, 우 리가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너무 위대한 사상을 사고하고 별들과 위성들과 해와 달과 계절을 계획하는 정신의 실체입니다.
이 정신의 실체는 흔히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때로 우리의 욕망을 단호의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판결합니다. 이 정신의 실체 는 흔히 우리의 생의 최후의 결정을 짓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신입니다.
(3) 최초에 우리의 정신이 비록 유한하지만 하나님의 무한한 정신은 비록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또는 하나님의 정신에 대해 의식적으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서로 항상 통화하고 있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항상 뻗어 나갑니다. 의문을 내고 욕망을 발하고, 호기심과 물어 보고 싶은 것들이 깃들고, 알고 싶어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에게 항상 돌입하여 생각이 가득하게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면 얻을 수 없는 특별한 원기나 생각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4) 간단히 말하면 이것이 바로 기도의 성격이며, 이것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정신이 하나님의 정신과 교통하는 소통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이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치면 당황스러운 생각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만일 당신이 전혀 기도해 보지 않고 다만 다른 사람이 기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기만 했다면 당신은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기도가 뻔뻔스럽고 참을 수 없이 들리기 때문에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2. 기도가 참으로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우리들은 그것을 참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두번째의 선행 조건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의 선행 조건이 됩니다.
(1) 기도를 믿는다는 것은 기도를 하는 말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들은 자신에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그 말이 오해되기 된다는 것을 잘안다.(얼마나 그런 일이 많은가? 그리고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받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되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그럼 나는 흔히 그 말들이 부적당하고 또 그 말들은 참으로 내 마음과 생각 속에서 나온 말들이 아님을 알며, 그리고 나는 사람들은 때때로 가까이하기 어렵고 거의 이해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의 말은 의사소통의 힘이 있고 적어도 나의 뜻과 참된 나 자신을 나와 함께 이야기하는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고 또 상대방의 말도 그의 뜻과 그 자신을 나에게 전달하는 힘이 있다고 알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비록 불완전하나마 말을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참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2)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기도가 마치 하나님의 행동을 지배하는 수단인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를 통해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도록,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도록 만드는 길로 여깁니다. 이러한 생각은 가치 없는 생각입니다. 기도는 그 이상의 큰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조정하는 수단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교통의 수단이며, 어느 정도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뜻을 함께 하는 수단이어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 속에 흘러 들어서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의 생명을 찾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3) 우리가 이런 의미에서 기도를 믿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당연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주를 비인격적인 것으로, 그리고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배우기를 최종의 산출물은 최초에 넣은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배웠습니다. 우리는 거의 아무 생각 없이 기계 적으로 물건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 어떤 사람에게는 우리가 기도할 때 우주를 인격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고 가까이 한다는 것을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우주의 현상이 광대하고 신비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사람을 대하는 식으로 접근하며 기계를 대하듯 접근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도 속에서 우리는 궁극적인 사실의 궁극적인 본성이 마치 인격인 듯이 우주를 대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일부를 나누어 받을 수 있게 되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생명 속에 참여할 수 있고 우리 생명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4) 기도의 힘을 믿는다는 것은 기도에 대한 의문과 해답을 전부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영원히 그것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항상 해답을 얻을 수 없는 기도에 대한 여러 질문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하여 알아 야 할 것들이 있다 해도 그것을 다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항상 기도를 둘러싸고 있는 점점 더 넓어져 가는 여백의 신비에 대해서 다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필요한 것은 기도를 하고 하나님에서 우리의 기도를,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경험을 하는 것뿐입니다. 참으로 이 경험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3. 이 사실은 곧 셋째와 마지막의 선행 조건을 지적하는 것으로, 즉 우 리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이런 종류의 경험은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이며, 단순히 기도에 대한 강의를 받거나 책 을 읽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직접 실제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1)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물론 소음을 피해 아무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하고 적당한 장소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꼭 기도원과 같은 '종교적인' 장소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아무 방해도 받지 않는다면 부엌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기도하고 싶을 때 따로 마련된 장소나 또는 언제라도 쉽게 마음에 편한 장소이면 어떤 곳이라도 거의 다 적당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기도하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셔서 산 속에서 기도하며 밤을 보냈습니다. 만 일 여러분이 참으로 기도하고 싶고 단지 기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이 살고 있는 곳에 비교적 조용하고 주의가 산만하지 않을 만하여 해야 할 기도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2) 다음으로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기도에 대해 생각하든 안하든 간에 끊임없이 계속되는 하나님과의 교통에 대해 이야기하고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의식적인 하나님과의 교통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 인간이 모두 그렇지만 만일 여러분이 기도하려고 하면 일정 한 시간을 정해야 합니다. 물론 언제나 기도할 수는 없지만 대개 여러분의 일상적 활동을 멈추고 기도에 임할 수 있는 시간을 따로 정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5분 동안으로 정하고(5분간으로 시작하는데 하루 24시간 중 5분이면 많은 시간이 아닙니다.), 다음에 15분으로 늘입니다. 아침에 5분이나 15분 동안하나님과의 교통을 갖는 것입니다.
(3) 그 다음에는 기도서와 같은 책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좋아할 책은 없기 때문에 누구나 자기에게 좋은 기도서를 발견해야 합니다. 나는 기도할 때 사용하는 노트가 있는데 그것은 기도할 때 정신이 산만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나의 기도를 노트에 적으면, 즉 기도를 말하는 대신 글로 적으면 큰 도움이 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순간적으로 내가 필요한 것들을 모아둔 기도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4) 이것들은 기도에 필요한 몇 가지 선행 조건들로서 이것에 대한 몇 가지의 숙고를 끝내기 위해 누가복음의 말씀 중 이것에 대해 매우 명백하게 나타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곤궁함과 기도와 능력이라!
소나기를 내린 기도
열왕기 상 18 : 40-45
James W. Cox
이스라엘의 북왕국 아합 임금 때에 삼년 반 동안 비와 이슬이 땅에 내리지 않았습니다(왕상 17 : 1). 실로 무서운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당시에 선지자였던 엘리야는 이 혹심한 가뭄을 해결하는 비를 내리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소나기를 내리게 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알아 보겠습니다.
1. 비가 안 오게 된 원인을 없앰
삼년 반 동안이나 비 가 오지 않게된 원인이 있었습니다. "테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 리니"(신 28 : 2D-24) 라고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 언약데로 하나님은 이 긴 기간동안 그 땅에 비를 멈추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으로 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고"(왕상 19 : 10) "바알을 섬겨 숭배했기"(왕상 16:31)때문입니다. 엘리야는 그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참 신이신 것을 확신시키고 이 바알의 선지자 450명을 기손 시내에서 죽이도록 그 백성에게 명령했습니다(왕상 18 : 39-40). 하나님의 응답은 죄가 청산된 다음에 오게 되어 있습니다(약5 : 16-17, 사 59 : 1-2).
2. 믿음으로 기도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41절). 비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비오기를 위하여 기도도 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옐리야는 비의 소리를 믿음으로 듣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해야 기적적인 응답을 얻습니다(막 9 : 23, 11 : 23-24, 약 1 : 6, 요 14: 12).
3. 간절히 기도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42절). 엘리야는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만 교통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의 기도의 모습은 그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행 4: 24-31, 12 : 5).
4. 응답될 때까지 계속 기도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 다"(43-44절).
엘리야는 한 번 기도하고 응답이 없다고 그만두지 알았습니다. 일곱번이나 계속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 응답을 받았습니다(45절).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약 5 : 17)입니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기도
출애굽기 22:20∼24
이상운 목사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면 동물과 다른 반응이 나온다고 합니다. 가령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플 때 사람은 서글픔을 느낍니다. 즉, 배고픈 것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처지와 신세를 연결지어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이방 나그네와 과부, 그리고 고아같이 심리적인 소외와 더불어 실제적으로 궁핍한 경우는 더욱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소외된 이웃을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1. 소외된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옛 속담에 "임금님도 거지는 다 구제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을 경제적으로 돕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지만, 우리가 물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아도 되는 핑계로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IMF체제 이후에 엄청난 실업자가 양산되었고, 물질적인 어려움은 가족들의 평화를 파괴하여 가출과 구타 등의 부수적인 큰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들을 물질적으로 어떻게 도울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음식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미 청량리의 다일공동체나 탑골공원, 서울역 주변 등에서 여러 선교단체와 교회에서 점심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혹시 개인이나 교회 차원의 도움이 어렵다면 이미 구제를 실시하고 있는 선교단체에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후원하는 방법도 필요할 것입니다.
둘째는 쉼터를 제공해야 합니다.
이것은 구청 등과 협의하여 공원 등의 공공시설에 레크리에이션 시설이나 휴식 공간을 교회 차원에서 운영하는 방법입니다. 셋째는 교회의 재정을 실업자를 위해 배려해야 합니다. 사회봉사비나 구제비 항목을 대폭 증액시키고, 절약할 수 있는 부분의 지출을 과감히 줄이는 구조 조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법적, 경제적 및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뜻은 단호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물질과 시간을 봉사하며 어려움을 당한 강도 만난 사람의 생명을 구한 선한 사마리아인같이 행동하는 용기를 보여야 합니다.
2. 소외된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이웃나라 일본의 학교폭력 중에 '이지메 현상'이 있습니다. 이것은 몸이 불편하거나 정신적으로 부족한 아이 또는 특정한 종류의 학생을 대상으로 여러 명이 합심하여 육체적, 정신적 핍박과 곤란을 주는 학원폭력의 일종입니다. 이것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더욱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중대한 범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정서적으로 이웃이 되어 주고 희망을 주는 손길이 되어야 한국사회 전체의 각박하고 경쟁 지향적인 성격이 공존과 생명존중의 사회 분위기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나폴레옹시대에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소년 군사학교 앞에는 오랫동안 사과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주머니 앞에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아주머니에게 "아직도 사과 장사를 하고 계시는군요." 하고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그것은 "나폴레옹 황제가 소년 군사학교에 다닐 때 아주 가난한 학생이었기에 사과를 사먹지 못하고 아주머니에게 얻어먹곤 했다는데 그것이 사실이냐?"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러자 사과장수 아주머니는 화를 벌컥 내면서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폴레옹 황제가 학생일 때 얼마나 의젓하고 씩씩하셨는데, 더욱이 사과를 사 드실 때는 꼭 돈을 내셨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변하셨는지 꼭 한번 보고 싶군요."라고 변호하는 말을 하더랍니다. 그러자 그 질문했던 사람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자신의 겉옷을 벗었습니다. 속에는 황제의 빛나는 제복이 보였습니다. 그가 바로 나폴레옹 황제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황제가 된 나폴레옹이 말했습니다. "아주머니께서 제가 돈이 없어서 사과를 못 사먹고 주변을 어슬렁거릴 때마다 강제로 사과를 여러 번 쥐어 주시면서, 용기를 잃지 말고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격려하신 것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하여 제 모습이 새겨진 금화를 한 웅큼 드립니다. 그리고 돈이 더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추가로 드릴 터이니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몸된 교회는 한국사회의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국민이 미래에 대해서 불안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능력을 나타내어, 희망과 용기를 부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어려울수록 사람들에게 소망과 격려를 주는 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소외된 사람들을 영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출애굽기 22:21∼27에서 궁핍한 자들에 대한 보살핌을 율례(律例)로서 나타내신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외국인들에 대한 학대 금지(21절)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이었던 시절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과부나 고아의 경우는 남편이 없거나 부모가 없기에 보호받을 곳이 없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부와 고아를 위해 추수 동안에 곡식을 남겨 놓아야 했고(신 24:19-21), 밭 모퉁이도 거두지 않고 남겨 놓아야 했습니다(레 19:9-10).
그런데 인간에게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만족이 채워진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살리신 나사로의 경우와 그밖에 치유를 경험한 수많은 환자들도 죽음의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한 자들과 어려움을 당한 이웃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참된 만족이 있음을 깨닫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출애굽기 22:23에서 하나님께서는 과부나 고아가 부르짖으면 그것을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큰 어려움을 만난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을 보면서, 내가 구체적으로 도우면서 힘쓸 일들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필코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신앙적인 사고와 결단을 실천하여 한국사회와 공동체적 연결점을 확장하는 모범을 보여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가는 날까지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내게 있는 소유와 지식적 재산들을 아낌없이 이웃과 나누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기도와 응답
열왕기상 3 : 4-13
1. 응답의 내용
1)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12)
① 지혜
동양과 애굽의 누구보다 뛰어났습니다.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보다 뛰어났으며 갈골, 다르다보다 더 하였습니다(왕상 4 : 30). 천하의 왕들이 그의 지혜를 들으러 왔습니다(왕상 4 : 34).
② 총명
잠언 3,000, 노래 1,005곡을 남겼으며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장의 우슬초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고 짐승, 기어다니는 것, 물고기를 논했습니다(왕상 4 : 32-33).
2) 부와 영광(13)
① 부
㉮ 세입이 금 666달란트였는데(왕상 10 : 14) 미국 대통령의 연봉 20만 불에 비하면 (금 1돈을 2만원으로 계산하여) 약 80배가됩니다.
㉯ 그의 하루 식비는 약 500만원이 되는데(왕상 4 : 22) 한 달 식비는 1억 5천만원이 됩니다.
㉰ 그가 가진 그릇은 금이며(왕상 10 : 21)
㉱ 방패를 금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왕상 10 : 16). 큰 방패와 작은 방패의 값은 약 92억원이 됩니다.
㉲ 그가 지은 성전은 금 값인 약 16조원이며 은값은 12억원입니다(대상 22 : 14 참고).
놋, 철, 재목(백양목) 그리고 인력비용을 계산에 넣으면 엄청납니다.
㉳ 그의 궁전은 13년 걸려 호화롭게 지었습니다(왕상 9 : 10).
㉴ 그리고 많은 성읍들을 다시 세우고 예루살렘에 각종 진기한 토목사업을 했습니다(대하 8 : 3-6),(전 2 : 4-8 참고).
3) 영광
태평시대의 왕(왕상 2 : 12)이었으며 처첩 1,000명(왕상 11 : 1, 3)을 거느렸고 스바의 여왕이 와서 그의 생활을 보고 정신이 현황활 정도였습니다 (왕상 10 : 1-9).
2. 기도의 내용과 동기
솔로몬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7). 그리하여 자기가 맡게된 재판하는 일을 실수없이 잘 할수 있도록 지혜로운 마음을 구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잘 보살피고자 하는 동기에서였습니다(7-9).
3. 기대 이상으로 응답하신 이유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10). 그는 자기를 위하여 장수, 치부, 원수타도를 구하지 않고(11),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분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백성이 복되기를 구하는 하나님 위주의 기도를 했기 때문에(마 9 : 33),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에 힘입어(삼하 7 : 12) 이 응답을 받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창세기 18:22∼33
이상운 목사
임진왜란 때 일본의 장수인 가등청정이 조선 호랑이를 생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리품으로 풍신수길에게 보내기 위해서 커다란 상자를 만들고 그 안에 호랑이를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부산까지 가는 동안 식량으로 먹도록 개 3마리를 함께 넣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부산에서 상자를 열어 보니 엉뚱하게도 호랑이가 죽어 있었습니다. 개 3마리의 단결된 힘에 그만 오히려 호랑이가 물려 죽은 것입니다. 결국 호랑이 대신 그 개 3마리가 일본에 보내졌는데, 바로 그 개들이 유명한 진돗개였습니다.
여러분은 중보기도의 능력을 믿으십니까? 비록 연약해 보일지라도 중보기도에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에 의지하기에 권능 있는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기도에는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의(義)를 앞세우는 기도였습니다.
아브라함은 "……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23절)라고 기도합니다. 칼빈은 "의인이 악인의 사회에서 같이 징계를 받을 수는 있으나 같이 멸망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신앙은 양적 공리주의의 태도처럼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기보다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의지합니다. 따라서 의인이 있는데도 숫자적으로 절대 다수에 의지하여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義)를 호소하며 중보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는 혼자일지라도 옳은 것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교회에서 정의로운 진리를 외친 집단은 퀘이커 계통의 교파와 본회퍼의 형제단 등의 소수였다고 합니다. 그 때는 어용(御用)교회와 많은 독일 국민의 비난을 받았지만, 그들은 양심적인 "바르멘 선언"(1934)을 통해 교회의 구세주는 히틀러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때 순교한 본회퍼 목사는 오히려 행동하는 양심이자 살아 움직이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표상으로 존경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앞의 이익이나 욕심에 사로잡히지 말고, 하나님의 의(義)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약속하셨습니다.
2.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생명을 구하려는 기도였습니다.
현대인은 육체적 건강을 위하여 운동을 많이 합니다. 예를 들어 조깅, 에어로빅, 조기축구, 테니스, 수영, 헬스 등의 운동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육체적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 건강입니다. 정신적인 지체아들은 몸집도 크고 힘도 세지만 지능이 떨어지기에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육체적 건강보다 균형 잡힌 정신적인 안정감과 내적 평안 같은 정신적 건강이 더 중요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하면 정신적 건강보다 영원한 생명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닌 영생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최종목표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영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조카 롯의 생명만이 아닌 소돔과 고모라의 많은 생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의인 50에서 시작하여 10에 이르기까지 무려 여섯 차례에 걸쳐 하나님께 생명을 살려 주시기를 간구 합니다. 아브라함은 당시 소돔과 그 인근의 5개 성읍에서 적어도 의인이 10명 이상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보여집니다. 동시에 아브라함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닌, 사회의 구원에 관하여 사랑과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근래 한국사회에는 생명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가정형편이나 현실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고 있고, 물질 얼마를 취하려고 다른 사람의 귀중한 생명을 해치는 강도들도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건강보다 더 중요한 생명을 중요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겠습니다.
3.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하나님과 인격적 대면관계에서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죄악입니다. 이것은 우상숭배나 음행과 같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심정에서 하나님과 인격적 대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신 기도의 내용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면의 기도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 간에 교통(交通)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겸손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는 인격적인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기도할 때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달라고 간구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중언부언(重言復言)하며 항상 같은 내용의 기도를 암송하듯이 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욕심과 성공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기도의 올바른 정신과 자세를 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대면 속에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리고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이루기 위한 중보기도에 열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간구하는 중보기도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나라가 국내외적으로 어떤 어려움을 만날지라도, 내 가정과 내 앞에 어떤 위기가 올지라도 우리의 눈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간구하고 순종할 때 문제가 해결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므두셀라처럼 969세까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또 부귀영화를 누리며 이웃에게 군림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일평생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면 가운데 동행한 것과 같은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날들과 영원한 세계에서까지 진정으로 평안하고도 안전한 반석 가운데 거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또한 여러 가지 상황을 만날 때마다 중보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비결이 있고,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능력의 손에 사로잡혀 나아가는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침과 저녁의 기도
민수기 10 : 35-36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을 예로 든다면 아마 출애굽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의 구원신앙의 핵심이며, 근간을 이루고 있는 뼈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400여 년동안 나라 없는 종살이를 하다가 해방되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벅찬 감동과 아울러 기쁨이 온통 그들을 들뜨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좀더 살펴보면, 그들의 기쁨은 잠시뿐이었고, 곧이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광야의 생활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광야에서의 40년을 생각해 보면, 그들이 겪었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애굽에서 겪었던 고난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매일 아침 만나로 구운 떡을 싫증 나도록 먹어야 했으며, 고기가 없어서 메추라기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3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움직인다고 생각할 때 거기에 따르는 온갖 번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도대체 이스라엘이 그런 역경을 이기고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무슨 힘이 있어서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40년 동안 그들을 지탱케 한 힘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낼 수 있다면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도 고난을 이겨나갈 큰 힘과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 오늘의 본문은 사실 하나의 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침에 진에서 일어나서 길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와, 행군을 마치고서 하루를 돌이켜보면서 드렸던 저녁의 기도가 바로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40여 년이나 계속 되었던 고통스런 여정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바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40년을 하루같이 계속했던 아침과 저녁의 기도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신앙의 힘은 기도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도가 갖는 힘은 막강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서도 기도하지 않았던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기도는 인간과 민족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2. 이스라엘의 기도는 기도의 참된 의미를 보여 줍니다.
기도의 참 의미는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임마누엘의 모습으로 우리와 늘 함께 계심을 기억하는 것이 바로 기도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일할 패나, 혹은 집에서 가사를 돌볼 때, 그리고 즐거운 시간을 가질 때나, 슬픔으로 가득 차있을 때, 그리고 심지어는 여행을 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훌륭한 기도인 것입니다. 중세의 어떤 신부가 길을 가다가 넘어지자 대뜸 위를 쳐다보면서 하나님께 왜 자기를 이렇게 넘어뜨리느냐고 항의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화를 내듯 하나님께 화를 냈다면, 이것은 그가 얼마나 평소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던 사람인가 하는 것을 잘 보여 주는 것인데, 이것처럼 멋진 기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편, 이스라엘은 어땠습니까? 이 들의 기도 역시, 먼 곳에 계신 하나님을 모셔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먼 곳에 계시고 나는 여기 떨어져서 전화를 통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 계신 하나님께 말씀드리듯 하는 것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35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여 일어나사'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담겨 있는 의미는 이스라엘이 법궤를 하나님의 보좌나 발판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기도는 옆에 계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꾸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부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멀리 계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밤새 그들 곁에 앉아 계셨던 하나님께 그들은 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돌아오사'라는 말도 이러한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수브' 동사(돌아오다라는 뜻)를 어떤 학자들은 '쉐바'(앉다라는 뜻)라는 동사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렇게 보면 법궤는 완전히 하나님이 일어났다가 앉으시는 보좌가되며, 그 보좌는 늘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부각되어 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합니다. 비록 법궤는 없지만, 하나님이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우리 옆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3. 그러면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 님은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1) 우리를 위해 싸우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할은 단순히 모르는 길을 찾아 주는 안내자의 역할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길 안내자의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 지만 이보다는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는 전사나, 용사의 모습이 본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출애굽기 15 :3에도 보면 "여호와는 용사 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라는 구절이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부를 때 '야웨 쯔바오트', 즉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출애굽과 정과 광야 생활, 가나안 입성 등 이 모든 것이다 전쟁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일하실 때는 수동적으로 길이나 찾아 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대적들을 만나면 그들을 쳐서 이기시는 적극적인 하나님의 모습으로 서 계시는 것입니다.
(2) 이것을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싸우는 동시에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싸우신다는 사실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것과 광야생활을 한 것은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는 것은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계획안에서 일하시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기도의 방향은 결코 자신의 목적이나 생각을 향해서는 안됩니다. 가장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육체의 정욕을 위해서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십니다(약 4 :3 참조). 모세가 아 침마다, 저녁마다 담대히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보면 하늘에서 이룬 뜻을 땅에서도 이루기 위해 기도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로 하나님을 강요해서 그분의 뜻을 내 뜻에 맞추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3)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기도하고 난 후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아침에 조용히 은혜롭게 기도하고 난 후에 그 결과를 잘 지키지 못하고, 은혜를 땅에 쏟아 버린다면 이것은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 우리 옛말에 "고을의 원님이 아침에 화를 내면 저녁때는 동헌의 강아지가 쫓겨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한 내용을 지키지 못해서 하루 동안 흐트러진 모습으로 살게 되면, 그 영향이 자신의 모습을 넘어서서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침에 기도하면 이 내용대로 살기 위해서 하루 종일 견실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시고, 우리가 져야 할 책임도 함께 지시며, 우리 생각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4. 이제 마지막으로 저녁에 이스라엘이 드렸던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1)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낮에는 일어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시고, 저녁에는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오십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천만인'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집합체로서의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각 사람 모두를, 즉 하나하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아오실 때, 나를 집합 속의 한 부품으로 보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 인정하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아무리 많은 사람 속에 섞여 있는 보잘것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있어서 나는 금강석처럼 빛나는 그분의 자녀인 것입니다.
(2) 낮에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애를 썼다 하더라도, 죄를 하나도 짓지 말고 완벽하게 살수는 없습니다.
거짓말도 본의 아니게 할 때가 있고 남을 미워하기도 하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우리는 은혜를 발견합니다. 낮 동안에 불충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시며, 시편 67편의 말씀처럼 그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춰 주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신앙의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종종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배신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늘 우리에게 신실한 분입니다.
야곱의 서원기도
창세기 28:20∼22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해서 얻게 된 쌍둥이 아들이 에서와 야곱입니다. 큰 자인 형 에서와 작은 자인 동생 야곱은 나중에 두 민족의 시조가 되고, 두 세력, 즉 육과 영의 싸움의 시발점이 됩니다(갈 15:17 참고).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은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내려졌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했을까요?
첫째로, 야곱은 집념의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25:24을 보면, 야곱은 출산할 때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올 정도로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인간적인 집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래서 붙여진 '야곱'이라는 이름이 나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이름인 '이스라엘'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모사꾼'이자 '사기꾼'에서 '하나님과 겨뤄서 이긴 자'라는 명예로운 이름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둘째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형 에서는 배가 고프다는 현실적인 어려움 앞에 본질적인 하나님의 약속을 팥죽 한 그릇과 쉽게 바꾸고 말았습니다(히 12:16-17 참고).
셋째로, 야곱은 영성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잘못된 방법으로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고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던 중이었지만, 그는 광야에서 돌을 베고 자다가 하나님의 사닥다리를 보게 됩니다. 야곱은 아침 일찍 잠이 깨어난 후 베개로 삼았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의 이름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 직장, 사업, 사회가 바로 벧엘의 현장이 되어야겠습니다.
다음으로 야곱은 하나님 앞에 요구와 서약을 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먼저 그는 하나님께 4가지를 요구했습니다.
1. 하나님의 동행을 요구했습니다.
"……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20절).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원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어떤 그리스도인은 물질적인 축복과 지위와 명예가 올라가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실 때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 서두에서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안에 정착하지 않았을 때는 진실로 평안을 누리지 못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이 오늘 본문인 창세기 28:13에서 약속받은 땅은 사실 기름진 땅이 아니라 광야의 허허벌판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쓸모 없는 황무지를 축복의 땅이라고 하시면서 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축복하실 때 좋은 환경, 순탄한 인생여정, 안락한 삶을 보장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현실과 마주치며 눈물과 땀방울을 흘리면서도, 척박한 땅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문전옥답(門前沃畓)으로 바꾸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보호를 요구했습니다.
"나를 지키시고"라고 기도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경비를 삼엄히 해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처럼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 나라의 앞날도 보장받지를 못합니다.
열왕기하 6장을 보면 아람 왕이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어 엘리사 선지자가 있는 도단성을 에워싸며 위협합니다. 그러자 엘리사의 사환이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며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때 엘리사가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사환의 눈을 열어서 보게 간구하니,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권능과 사단의 궤계(詭計)와의 전쟁임을 알게 합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면 우리는 안전함을 믿어야겠습니다.
3. 먹을 양식과 옷을 구했습니다.
기도는 대단히 고차원적인 것을 간구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개인적이고도 구체적인 필요까지도 상의하는 친밀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로 야곱은 가장 기본적인 옷과 양식을 계속해서 공급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도 실제적인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구원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필요도 아시고 채워 주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4. 가나안으로의 귀환을 구했습니다.
"나로 평안히 아비집으로 돌아오게 하시오면 ……"(20절)이라고 기도합니다.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해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이와 같은 4가지를 주실 때 벧엘이 예배의 중심지가 된다는 의미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야곱이 서원한 서약은 3가지였습니다.
첫째로, 여호와 신앙입니다.
야곱은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21절 하)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제 조상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서 야곱의 하나님으로 야곱을 인도해 주시게 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겠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곳에 하나님의 성소를 세운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자손들에 의해서 벧엘이 성소가 된 것은 확실합니다. 참된 예배자가 정성껏 예배하는 숨은 예배처의 선구자였습니다.
셋째로, 십일조 헌납을 약속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준 사실(창 14:20)이 십일조 헌금의 기원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십일조를 나중에 바친 것으로 믿어지며, 모세의 율법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엄격히 십일조 헌금을 지켰습니다. 오늘날도 우리의 소유권 전부가 사실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상징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서원(誓願)이란 하나님 앞에서 결심하는 것으로 선한 결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신실하지 못한 태도는 주의해야 합니다. 진실된 경건은 언행이 일치하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서원이 실제적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체적이고도 매일매일의 필요와 소원을 하나님께 간구하며 동행하고자 하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는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날마다, 사건마다 지
속되는 은혜가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
미가 6 : 8
오늘 저녁 우리들은 분단된 조국의 깊은 상처와 아픔을 안고 대결과 분쟁, 부정과 포악으로 뿌리 깊이 침식 네게 구하시는 것 되어 있는 이 사회현실을 직시하면서 제 74회 장로회 총회로 모였습니다. 우리의 조국은 오랜 세월 대륙과 대양, 양대 세력이 마주쳐 감도는 교두보의 위치에서 많은 수난을 겪어 왔습니다. 그런 중 세계 양대진영의 대치선이 우리 나라의 허리인 38도선에서 끊고 지나간 후, 조국은 세계의 최전선이 되어 버렸고, 휴전선을 가운데 두고 40여년 간 냉전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이 민족이 안고 있는 최중대사는 밖으로는 두말할 것 없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내는 이 나라의 안전보장이며, 안으로는 골수 사무쳐 멍든 이 사회의 병폐현상을 치료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백리 안팎에 악랄한 공산대적과 대치하고 자라온 세대들에게 그 실체를 알려 주지 못하였고 극도로 썩어 빠진 우리의 의식구조를 고쳐 주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민족의 통일이 국가의 지상과제라고 생각하고 통일논의에 백가쟁명(百家爭鳴)을 이루고 있습니다. 슬프게도 이것은 남북통일은커녕 남쪽을 다시 여러 갈래와 조각으로 더 분열하는 꼴밖엔 되지 못했습니다. 통일을 하자고 통일논의를 하는 것인데 통일논의를 하다가 거꾸로 분쟁과 상극을 더 격화시켰으니 그것처럼 어리석고 우스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른 것은 다 할 수 있어도 공산 통일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자유와 민주와 인권이 보장되는 통일만이 유일한 통일이라고 간주하는데 어찌하여 북쪽의 사회주의 유일체제 하의 자유도 인권도 없고, 민주도 하나님도 없는 체제제도에는 함구하면서 눈을 감아 버리는 일은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가공할 통일논의 입니까? 따라서 우리 사회는 이념과 사상 투쟁으로 심히 격동하며 출렁대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시장경제가 통제경제를 이기고, 개인의 가치가 전체의 가치를 이기는가 하면, 자본주의의 문명기구가 공산독재의 탱크를 이긴 죽어 가는 공산주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요즘 동구에서 수많은 인구가 서구로 빠져나와 탈출하는 현실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체제대결에서 철의 장맛 저쪽의 체제가 어떻게 퇴조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실증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세아 쪽에서는 무력으로 적화통일을 달성한 베트남으로부터의 선상 난민이 계속 바다 위에 줄을 잇고 심지어 중국인까지 베트남인으로 가장하여 중공대륙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는 악랄한 이데올로기적인 독단이 수천 수백만의 생명을 짓밟아 버린 결과입니다.
그 동안 우리 사회가 일부 통일지상주의적 경향으로 큰 혼란상을 보여 왔습니다. 마치 우리측에서 통일의지와 통일방안이 없기 때문에 통일이 안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통일신중세력을 매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일은 강한 민족애나 하나의 조국애에 대한 감상적인 열정만으로 성취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북한체제로의 흡수통일이 아니라면 통일논의는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 이 사회를 몹시 들끓게 하고 소용돌이치게 하는 궁극적 원인 한가지가 있는데 한마디로 이 사회의 도덕성의 약화와 결핍입니다 빈부간의 심화된 갈등과 세상 소용돌이의 결국은 도덕성 결핍이 그 이유인 것입니다. 축재과정의 도덕성과 공정성 및 정당성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의 모든 갈등과 분쟁의 궁극적인 원인을 캐보면 그 한가운데에는 어김없이 도덕적인 쟁점들이 걸려 있습니다. 이 사회에는 각색 부정과 부패, 불의와 비리 등이 너무도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사회는 다수의 침묵을 강요하는 이런 행동철학인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세력의 의견과 다르거나 또는 불리한 사실을 피력하거나 보도하는 경우, 전화 등을 통한 정신적 폭력, 협박과 매도가 일상화되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현재 이 같은 침묵을 강요하는 폭력현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독선의 교도주의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이런 사회는 전체주의로 갈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 자유민주주의의 위기가 있다고 보며 이는 물론 민주화에 역행하고 있다는 징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의 이 갈등과 진통과 분열을 어떻게 해소하며 모처럼의 애써 얻은 이 전환의 기틀 속에 어떻게 새 질서를 부여해 넣으며, 모처럼의 변혁의 바람을 어떻게 수용해서 대한민국이라는 우리의 공동체를 자유민주주의 하에 잘 보존 성장해 갈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절박한 과제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나라를 성장시키던 근면과 검소의 미덕 을 몽땅 상실하게 되어 사회는 사치에 흐르고 쾌락과 퇴폐로 병들어 도덕과 정치와 경제는 성장의 활력을 잃고 무력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분열과 상극의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은 관용의 정신이 모두 없어졌다는 점입니다. 관용의 정신이 없을 때 우리는 사퇴(死退)하며 삭막하게 될 뿐만 아니라 나라를 키워 가는 단합된 창조의 힘을 창출해 내지 못합니다.
또 한 가지는 이 나라의 주권을 행사하는 통치력의 부족과 따라서 공권력의 실추현상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으며, 학생은 선생의 머리를 삭발하게 되었고, 국민은 믿을 만한 정치가가 없어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악은 고개를 들고 횡행하게 되며, 폭력은 일상화되는 법입니다. 로마의 절대적인 권위의 황제가 일 년이 멀다하고 암살되며, 거리에는 포악범들이 난무하면서 공권력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통치력은 허약해졌습니다. 로마는 그렇게 쇠망해 갔습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잘살게 되리라고 낙관할 수 있는 조짐은 어디를 보아도 찾기 힘듭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배는 지금 사공이 없어 제멋대로 표류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 시점에 선 우리들은 한국교회의 장자적 위치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주재하시는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임을 깊이 살피는 일은 필수적이며 최우선적인 일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오늘의 비리와 부정의 와중에서 우리에게 공의를 행하기를 구하십니다.
인류역사의 흥망을 살필 때 성경에서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는 진리의 하나는 민족의 존망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사실과 그러기에 그와 믿음으로 연결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민족을 위한 중보(仲保)사역 여하가 민족의 흥망을 좌우한다는 진리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이 사회의 병폐와 민족흥망에 직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의인 때문에 받는 복과 구원, 이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중에 받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나라와 민족의 성쇠를 논할 때 외면적인 물리적 조건에 의지하여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은 민족이나 문화의 흥망의 척도는 정신적인 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나라 그 민족성이 어떠하며, 그 민족의 도덕수준은 어떠하며, 그 민족이 얼마나 바르게 살며, 깨끗이 살며, 옳게 사느냐, 즉 그 민족 안에 공의를 행하는 의인이 얼마나 있느냐, 이것이 민족의 저력이며 국가의 힘이고, 문화의 흥망을 마지막으로 결판 내리는 척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 대다수가 어떻게 하든지 간에 하나님께 사죄와 구원을 중보 할 그의 백성들이 그 처한 위치에서 진실한 신앙을 고백하며 소금된 나만은 그 위치에서 만연하는 부패를 막아서고, 믿음으로 의인된 나만은 그 의를 사수하고 그 의의 세력을 내 주변에서부터 펴내는 자가 되면, 이런 자의 수가 지극히 적다 할지라도 이 소수의 의인이 이 사회의 등골이 되고 기둥이 되어 이 의인 때문에 주저앉을 사회의 국가가 버티어지는 것입니다. 각종 비리와 부패로 병들어 있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자기 주변에서부터 깨끗한 빛을 발하는 거듭난 영혼의 소유자로 차분히 자신을 녹여 썩음을 막아내는 거듭난 의로운 인격을 가진 세력으로 이 사회 저변에 자리잡고 자기와 민족의 죄를 뼈저리게 통회하며 그 의의 삶을 펴내기를 하나님은 요구하십니다.
2. 관용의 정신이 없이 대립과 단절과 분쟁으로 진통하는 이 사회에서 하나님은 인자(仁慈)를 사랑하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역의 결실은 사랑과 봉사의 바탕에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고 인격의 핵심을 이루는 요소는 사람의 사랑하는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과 진보의 척도는 지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얼마나 많이 사랑할 수 있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실로 용서의 정신이 없이 단절과 상극으로 진통하는 이 사회의 짙은 불신이 신뢰로 변하고, 갖은 오해를 이해로 바꾸고, 편견과 질시의 벽을 무너뜨려 화해의 실마리를 찾으며, 원한과 대립이 있는 곳에 관용과 협동을 심고, 빈부의 심각한 격차가 없도록 부유층과 지도층이 저소득층을 참되게 의식하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토대한 봉사사역의 걸밖에 이 사회의 멍든 곳을 치유할 길은 없는 것입니다.
사회는 언제나 그 밑바닥에 동정과 이해와 친애로 사귀는 이와 같은 사랑과 봉사의 종용한 대다수가 깔려 있을 때 비로소 저력을 갖게 되며, 그 사회활동이 건전하게 되는 법입니다. 백성을 사랑할 줄 알고 인자와 친애로 곤고한 자를 찾으며, 그를 섬겨 위로와 격려를 주는 세력으로 이 사회의 저변을 형성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기반을 잃고 거칠어지며 메말라 버립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십자가에 계시한 당신의 거룩한 사랑의 공동체로서 이 사회에 교회를 두신 것 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느 곳에 무슨 직업과 계급을 가졌든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임을 기억하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을 되찾고, 동정과 이해와 친교로 강하게 결속하여 성실하게 봉사하는 거룩한 사랑의 공동체로서 이 사회의 저력을 형성하는 일을 하나님은 요구하고 계십니다.
3.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조물이며 더러운 죄인임을 자각하고 겸손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참된 권위를 상실하고 포악으로 거칠어 황폐한 이 사회에 하나님 앞에 죄인이요, 피조물임을 참되게 의식하고 발에서 신을 벗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사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겸손으로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생활을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오해가 있습니까? 기도는 염불도 아니요, 주문도 아닙니다.
기도란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향하고 그의 뜻을 분별하여 좇으며, 그 중심을 하나님께 토설하고 그의 임재를 모시고 사는 생활을 뜻합니다. 우리 개인의 문제이든 민족의 문제이든 병들고 상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치료하여 힘을 주고 재기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나타난 모든 지도자들은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복을 달라고 하지 않고 죄를 자복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하여 병든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 고침 받아 복을 받을 만한 의로운 민족, 의로운 국가가 되기 위하여 민족의 대제사장으로 의롭게 살면서 간절히 겸손하게 기도했습니다.
사실 기도는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는 행동이요, 삶이기 때문에 기도 자체가위대한 신앙행위입니다. 하나님과 겸손히 밀착되어 있는 신앙행위는 생의 모든 근심과 좌절을 이기게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영혼에게 가장 확신적인 평안과 복을 가져다 주며, 절망과 불가능을 극복하게 합니다. 이 민족과 이사회의 골수에 찬 병폐는 기도 이외의 다른 길로써는 치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절망적 국난을 당할 때마다 민족의 죄를 짊어지고 회개하면 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여 국란을 타개하고 새로운 부흥을 촉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결탁하고 그의 손을 바라보며 의지하고 기도하는 민족은 영원히 강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국민이 거칠어 상해 있다면 분명히 중보자인 교회의 겸손한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겸손한 회개와 순종의 기도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제 74회 총회 총대여러분!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에 공의와 사랑과 겸손으로 응답하고 민족구원과 구국운동의 선봉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기도의 힘
이사야 40 : 31
Lowell M. Atkinson
오늘의 본문말씀 속에서 우리의 절대적인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재충전에 관한 주제를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필요로 하는 것은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힘이며, 이 것을 위한 재충전은 기도로써 가능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길에서 자기 교회의 교인을 만나서 인사를 합니다. "안녕 하십니까 ?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목사님, 오늘 하루 평안히 잘 지내십시오." 목사님의 인사에 이어 이렇게 답례가 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서로 이러한 인사를 주고받았다고 해서 그날 하루가 힘있고, 평안한 날이 되는 것입니까? 또 실제로 우리의 하루 가운데 생동감 있는 시간을 따져보면 부끄러울 정도로 적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디로부터 우리의 날들을 지키는 힘이 주어지는가? 이 힘든 세상에서 용기를 갖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은 어디서 구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1. 이사야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단순합니다.
우리에게 힘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을 고대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대 하는 사람에게 약속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매일매일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대답은 '기도', 그것도 영적인 기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대답입니다. 이사야의 이 가르침은 젊은이들도 귀담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그렇습니다. 육체적인 젊음에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힘은 하나님을 향해서 고개를 돌릴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31절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하나님께서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힘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다 밝고,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깊이가 있는 사회로 만드는 것은 젊은이들의 책임인데, 그것을 이룰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이사야의 가르침은 젊은이들에게만 아니라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하는 성인들에게도 소망의 말씀이 됩니다.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31절). 사업이나 장사나 회사원으로서의 업무나 기타 여러 가지 일을 할 때 항상 힘이 솟구쳐 오르는 가운데서 생활하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즉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31절 말씀은 달음박질을 해야 할 정도로 사업이 왕성할 때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는 말은 어떻습니까? 상태가 조금 저조할 때를 가리키는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때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힘을 주시는 것은 항상 마찬가지입니다.
한편으로, 이 말씀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소망을 던져 주는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한 아무리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제 노인이 되어서 삶의 페이스가 뛰어가는 빠르기에서 천천히 걸어가는 속도로 늦추어지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약속은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면 우리는 결코 비틀대거나 피곤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대하고 있는 본문은 원래 주전 6세기 중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유대인들에게 희망을 주 기 위한 말씀입니다.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라는 말씀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귀환포로들의 첫 행진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마치 그들의 힘찬 행진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또한 날기 위한 마지막 시험을 끝내고 힘차게 날개 짓을 하는 모습에서 걸어가도 결코 곤비치 아니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생을 표현한 한 폭의 그림입니다.
그러나 이제 막 치솟아 오르는 시작이나, 어떤 하나의 강 한 행동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추진력까지를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의 행진이라는 것은 매일 매일의 행진이 합해져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행진 속에서 우리가 비틀거리거나 지쳐있을 때에 아무리 걸어도 피곤하지 않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위대한 성경교사였던 조지 아담 스미스(George Adam Smith)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에는 무엇보다 먼저 이상을 가지고 열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지쳐서 허덕거리며 걷게 될 때에나, 비전이 점점 엷어져서 사라져 갈 때면, 실상은 문제가 이제 막 핵심을 둘러싸고 접근해 가고 있다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믿고 소망 가운데서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약속이 다 흩어져 버리고, 우리는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상황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견고히 붙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로부터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영감과 능력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분의 약속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에 충분한 것이며, 그 용기로 인해서 평범한 일상 가운데서 절정의 기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서 사셨다는 사실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중근동의 한 지역에 발을 내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하셨던 말씀도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새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빵과 꽃들과 기후에 대해서도 언 급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일상에 관한 이런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목회의 패턴을 엮어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 어디에서나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일용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축복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2.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이렇게 놀라운 재출전의 힘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러한 것을 방해하는 요소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힘찬 삶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바로 '서두름'과 '염려함'입니다.
(1) 서두름은 우리가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시간을 빼앗아가 버리기 때문에 방해가 됩니다.
서두름보다는 기다릴 줄 아는 여 유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은혜를 내리십니다. 기도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분의 대답을 듣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도 가운데 듣는 시간이 있을 때 기도는 놀라운 힘을 갖게 됩니다. 진정으로 기도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서로 대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할 기회만 갖는 것은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은 보다 깊은 통찰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의 바쁜 시간 속에서 잠깐시간을 내어 오늘은 하루 종일 무엇을 했고, 왜 했으며, 어떻게, 어디에서 했다는 식으로 보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모습이 아닙니다. 이러한 기도는 아주 낮은 상태의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의 수준을 이것보다는 더 높게 올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삶을 그분에게 열어 놓읍시다. 그리고 그분으로 하여금 말씀하게 합시다. 우리가 서두르면 결과 적으로 기도는 방해받고 맙니다. 기도하기 위한 시간을 마련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바쁠 때에는, 우리가 단지 기다릴 수 있기만 해도 하나님께서 새 힘을 불어넣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2) 서두름이 한 쪽의 방해물이라면 다른 쪽에서 방해하는 요소는 '염려'입니다.
염려는 단적으로 말하면, 당신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는 기독교는 죽어 버린, 형태만 남아 있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축복은 실존의 자리를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에게 옳기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그분을 마음껏 의지하고 우리의 소망을 그분께 둘 수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마치 선과 사랑과 능력의 집합체와 같습니다. 그분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누구든지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안온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독특한 선물이며, 하나님의 계시가 능력이 있는 이유입니다. 이제 우리는 염려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돌보시고 염려하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걱정을 던져 버려야 합니다. 팽팽한 활시위처럼 긴장된 생활은 이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속에서 풀어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그 분께서 잘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염려하면서 사는 것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필요한 것들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염려는 더더욱 그 대답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우려가 빚어내는 증후군일 뿐입니다. 염려하면 할 수록 우리의 좌절은 더욱 커지며, 우리의 믿음 없음만이 더 드러날 뿐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이 있음을 기억합시다. 염려와 서두름은 은혜를 막는 장애물이며, 우리의 기도의 능력을 말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진정으로 깊은 신앙의 체험으로 들어가는 길은 영적인 기도이며, 이러한 기도가 있을 때 매일의 생활에서 넘쳐 나는 힘을 경험하게 됩니다. 새로운 힘을 얻을 것과 생기를 지속하는 것, 그리고 모든 일을 이루어내는 능력과 견디는 힘을 주는 성경의 약속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놀라운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제 손을 내밀어서 그것을 잡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은 그분의 능력과 평화를 즐거워할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요한복음 17:20-26
요한 17:20-26의 놀라운 말씀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기도는 계승되는 모든 세대에 걸쳐 하시는 기도로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의 개인적 기도생활의 거룩함 속에 들어갑니다. 한편 우리는 사람들의 하는 기도를 들어보면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1. 예수는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했습니다.(1-5)
(1) 예수의 구세주로서의 일이 나타날 때가 이르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가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4절) 우리는 이 말씀에서 일을 잘하신 데 대한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낍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속죄하여 주시는 품성을 보여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2)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육신 이전의 영광으로 "아들을 영광되게" 하실 것을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부활절 아침과 예수의 승천으로 충분히 응답되었습니다.
2.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11절)
(1)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도들을 순결하게 되도록 돌보아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11절)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이 사도들도 일치하기를 구하였습니다.(15절) 사도들은 세상에서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떠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께서는 사도들의 선교에 관해 기도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성하시고 사역을 위하여 그들을 따로 떼어 보내실 것을(17절)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선교의 길로 보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선교 사역이었습니다(18절). 이렇듯 사도들과 우리들의 선교사역은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3. 우리를 위한 예수의 기도(20-26 절)
(1) 예수께서는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21절)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서로 매우 다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지 목적과 목표를 위해 일치하여 주님께 봉사하도록 해보시기 바랍니다. 불화는 혼란을 낳고, 이교도의 세계에 대해 약한 믿음의 증거를 보이게 될 뿐입니다. 우 리가 일치해야 할 목적은 복음전도입니다. 즉 "세상으로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2)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기도하셨습니다(26절).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 : 28). 예수에서는 또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며 예수의 영광을 보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은 종말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은 우리의 종착지이며 우리의 영원한 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성육신과 죽음의 '시간사이에' 살면서 여행길에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주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며 영원토록 예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3) 기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진리로 용기를 내고, 강해지며, 감히 어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에 다다를 수 있을까?
고린도 전서 1:10-13, 3:11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가 나뉘었나?”라는 질문을 제일 처음으로 하였습니다. 이 문제의 질문이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그리스도가 나뉘었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일치의 가능성을 더욱 희박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모임에서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에 대하여 장시간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들은 기도를 하면서 우리들이 하나가 되게끔 하나님의 은혜를 내려 달라고 간구합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그리스도의 고귀한 부르심에 다다르지 못하고 죄를 짓고 있음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분열되는 것이 우리의 본성임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1.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가정에서도 연합되어지고 평화를 이루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까? 지난 20년내에 우리는 우리 가정의 식탁이 전쟁터가 된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최근의 갤럽조사에 의하면 평범한 가정내에서 한 사람이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 그 가족수 만큼이나 많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습니다.
(1) 그리고 교회에 관하여는 어떻습니까?
개인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바람 속에서 가족들이 모두 너무나 멀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길을 선택할 권리가 있으므로 부모들은 우리의 자식들이 신앙에 대해서 관심만 보여도 감사해야 할 지경입니다. 그래도 괜찮은 것 아닙니까?
(2) 또한 문화와 사회의 부름이 있습니다.
한 가정이 화합이라는 단어에 비슷하게 접근하게 되었더라도 이 정신없고 복잡한 사회는 그 사이를 파고 들어 행복한 가정에 금을 그어 놓고 맙니다. 얼마나 복잡한 줄 아십니까? “나는 컨트리 클럽의 멤버야” “나는 골프 클럽에 속해 있어.” “나는 무슨 수영 클럽에 속해 있어.”
(3) 소위 이러한 취미생활이 집안의 화목을 위한 어떤 노력보다도 우선 순위를 차지한다면 심각하게 가족잔치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 인생의 가외의 선물은 없이도 살 수가 있지만 사회생활에서의 기본요건인 가정의 화목 없이는 하루도 지탱해 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 가정에 대해서는 그만하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 직장과 사업처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1) 그 곳에서는 분리주의가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경쟁이라고 불리는 것이 그것입니다.
(2) 우리는 모두 잘 살고 싶어합니다.
우리들은 봉급이 인상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들은 금전적인 성공이라는 회전목마를 타고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들을 이기기를 원합니다. 그 사람을 이기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피를 쏟기까지 할 것입니다.
3. 우리가 화합이라는 문제를 생각할 때에 생기는 문제는 어쩌면 인간의 죄성에서만 기인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 모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1)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 어떤 것을 위하여 타협해야 한다면 나에게 중요한 무엇인가를 잃을 것 같은 불안감이 항상 있습니다.
사실 그것이 인간 최초의 죄악 직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2) 그 이전에는 아담, 하와,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물들과 화합하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평화와 번영의 낙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시점에까지 이르는 자기 이익에 개인의 권력을 향한 굶주림을 섞고 마지막으로 경쟁심을 섞으면 바로 치명적인 분열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4. 이제는 고린도 전서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20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는 무척 쉬운 일입니다. 우리들은 그들이 완강하게 매달리고 있던 그 파괴적인 분열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2) 저는 바울 사도가 그의 펜을 내려 놓고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들에게 권고합니다.
당신들 모두가 화합하며, 당신들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목적으로 하나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시대와 장소에 관계없이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언제 어디에서 발견되든지 간에 교회의 분열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눈을 열고 고린도교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들 자신들이 우리의 나쁜 생각과 분열된 마음을 걸치고서 교회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그리스도를 향한 열성과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의 이익의 목전에서 희생된다면 바로 그 때에 교회가 부서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시다시피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극심한 자기 이익에 물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또 교회로서의 그들의 생존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바울 사도는 그들을 권고하였습니다.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 현재 교회의 현실을 인식하면서 바울 사도의 말씀을 읽을 때에 한 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기서 그러한 것에 다다를 수가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계속해서 개인의 자기 이익을 우리의 분열을 치료하는 목적에서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완전한 화해와 갱신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회개하는 기회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성경은 우리에게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결과는 결코 인간의 연약하고 변덕스러운 신앙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그것이 어려움 많은 이 세대에 살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한숨 돌리고 있으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는 우리의 불명예스러운 행동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더 크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육체에 가시
고린도 후서 12 : 1-10
William Sloane Coffin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표현한 '육체에 가시'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육체에 가시는 배의 밑바닥에 생긴 조그마한 구멍과도 같은 것으로서 그 구멍은 작지만 배를 침몰시킬 수도 있는 것과 같이 우리를 파멸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일도 많지만 또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는 싫은 일도 많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는 것이 바로 가시입니다. 이러한 가시는 우리에게 고통과 손실- 즉, 병들고, 믿음과 희망, 기쁨과 사랑을 잃고, 힘을 잃는 것 등-을 주지만 우리는 그것을 쉽게 빼내 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힘을 잃었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는 얼마 전에 있었던 이란의 인질 사태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53명의 인질이 이란에 납치되어 있었지만 그 인질들은 그곳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많은 고통을 받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창피한 것은, 요즈음은 국가간의 외교가 힘의 논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가시에 대해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1) 일반적으로 기도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각을 좇아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정말 자신의 문제에 부딪쳐 간절해질 때 '우리 아버지'가 아닌 '나의 아버지'에게 기도하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의 육체에 가시와 같은 존재인 납치범, 강간범, 흉악범 등이 '우리'라는 것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2) 하지만 어떤 때에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기도를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러한 예인데,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감정을 주께 고할 때 아주 상세하게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는 너무 점잔은 경향이 있습니다. 상세하게 기도하십시오. 그 기도가 유치하다거나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는 이러한 모든 기도와 간구를 소중하게 여기 십니다.
2.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첫 번째 기도하였을 때 또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기도하였을 때 각각 어떠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1) 사도 바울은 첫 번째 기도하였을 때 그가 본문에 말한 것과 같은 응답을 얻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첫 번째 기도 후 사도 바울은 주님께로부터 어떤 직접적인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아마 조금 더 마음이 성숙하여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주님의 응답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며, 이것도 보통의 경우에 기도에 대한 충분한 응답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도 바울은 첫 번째 기도 후에 분노, 당황, 슬픔 같은 것을 떨쳐 버릴 수 있었을 것이며,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이런 것들을 떨쳐 버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2) 그러면 두 번째 기도 후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마도 바울은 주님께서 "바울아, 너의 기도를 내가 듣고 있노라. 하지만 나의 무지개를 보기 위해 비내림과 햇빛비춤이 다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노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긴장은 삶에 고동소리가 나게 해줍니다. 고통은 기쁨보다 더 성숙한 삶이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싹트고 번영하는 데 '인생에 가시'가 필요한 것임을 부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적응해야 합니다.
(3) 이제는 세 번째 기도를 생각해봅니다.
세 번째 기도 후 사도 바울은 시련을 통한 주님의 진정한 자비로움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세 번 주께 간구 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 말씀은 성경의 위대한 말씀 중에 하나이며 또한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3.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을 읽고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이 우리들을 보고 남에게 눌려서 지내는 현관에 놓인 신발털이개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가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구절의 뜻을 이런 식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온유하다'라는 말의 그리스 어원은 '에너지를 제어하다.'라는 것으로서 야생말을 길들이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야생말은 "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온유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 속의 가시에 의해서 온유해집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데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실패를 통하여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단의 사자'는 하나님의 사자가 될 수 있으며, 마귀가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해주시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기를, "이는 내가 약할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뜻에서입니다.
4. 그러므로 우리가 육체의 가시에 의해 고통받고 있다면 본문인 고린도 후서 12장과 더불어 4장도 읽어보십시오.
4장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는 구절들을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하루를 시작해 보십시오. 주님께 기도할 때 당신 육체의 가시에 대하여 세세히 전부 고하십시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 그대로를 전부 표현하고 아주 쉬운 말로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하지만 그 기도는 당신의 문제를 아주 정확히 이야기하는 기도여야지 일반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당신의 기도에 대해 응답해주시도록 기도하지 마십시오.
주님께 "하나님, 제가 이야기하는 것을 대답하실 필요 없이 단지 듣기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일주일쯤 지나서 똑같은 기도를 또 하고 육체에 가시가 아주 심할 때에는 이렇게 몇 번이고 반복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다 보면 아마도 당신은 당신의 문제에 대해 시들해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당신은 이러한 고통과 분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적과 친구가 될 수 있으며 화합할 수 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였고 또한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라고 하고, 그리고는 승리하여 말하기를,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응답받는 기도
마가복음 9 : 14-29
James W. Cox
본문에는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이 들린(25) 아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온 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는 믿음이 좀 부족했지만(24) 예수님께 구했던 것을 얻어 돌아갔습니다. 이 아버지처럼 아직 믿음이 부족한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할 것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 : 9)라고 말씀하셨는데 요한 14 : 14에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한 10 : 30에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요한 16 : 15에는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 기도하든지, 예수님께 기도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기도하면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보혜사 성령께" 혹은 "성령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성령님도 예수님 이름으로 오십니다(요 14 : 26). 이 아이의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부탁했으나 아이의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18). 제자들은 전에 받았던 예수님의 능력을(마 10 : 8) 지금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도의 응답은 예수님께로부터 옵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다른 어떤 능력을 행하더라도 모두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게 되 었습니다(행 16 : 18).
2. 솔직하게 기도할 것
예수님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21). 형편을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는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24)라고 솔직하게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왕 히스기야의 솔직한 기도를 읽을 수가 있으며(왕하 19 : 1-4, 14-19, 20 : 2-3) 우리 주님의 솔직한 기도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마 26 : 39).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솔직하게 드리는 기도 또한 읽을 수가 있습니다(행 4 : 24-30).
3. 힘을 다하여 기도할 것
"곧 그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24). 마음과 뜻과 정성을 합하여 오로지 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응답이 옵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 : 13)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멜산 위에서 불의 응답을 기다리면서 엘리야는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왕상 18 : 36-37). 그는 비 오기를 소원하면서 역시 갈멜산에서 기도할 때에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왕상 18 : 42)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삼손이 다곤 신전에서 마지막 한번만 더 힘을 주시도록 기도했을 때에도 전심으로 부르짖었습니다(삿 16 : 28).
4. 끈덕지게 계속 기도할 것
이 아이의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부탁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을 때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많이 모여와서(14, 25) 아이의 수치스러운 모습 때문에 부끄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끈덕지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눈뜨기를 예수님께 간청했을 때 옆에 있는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했으나 그는 "더욱 심히 소리질러"(막 10 : 48) 간청하여 마침내 응답을 받았습니다. 비 오기를 위하여 기도했던 엘리야도 일곱 번까지 간절하게 기도하여 소나기가 내리는 응답을 받았습니다(왕상 18 : 44). 우리 주님께서도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눅 18 : 1)을 말씀하시면서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이야기를 말씀하셨고,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말씀에도 낙심하지 않고 간청하는 가나안 여자의 기도를 칭찬하시고 응답하셨습니다(마 15 : 28).
불행의 문제
시편 30 : 1-12
S. Robert Weaver
1.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이 시를 쓴 다윗은 병에 걸렸습니다. 다윗 뿐만은 아닙니다.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그 종류야 어떤 것이든 크고 작은 불행을 만납니다. 그 불행을 이 시에서는 저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혹은 병일 수도 있고 혹은 사업의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재난일 수도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도 이 불행의 저녁은 찾아옵니다.
2. 저녁은 반드시 아침으로 바뀐다.
그런데 이 불행의 저녁은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행 때문에 살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큰 불행이라도 끝장이 나는 법입니다. 병에 걸려도 그렇습니다. 낫든지 죽든지 끝장이 납니다. 사업의 실패도 그렇습니다. 다시 일어나든지 영영 넘어져 버리든지 할 것입니다. 재난 역시 회복이 되든지 영영 회복이 안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3. 기쁨의 아침을 맞으려면 다윗은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만있으면 저녁은 아침이 되지만 기쁨의 아침은 오지 않습니다.
1) 주께 기도해야 한다
다윗은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2)라고 말합니다. 불행이 닥쳤을 때 시간이 지나서 회복되는 요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요행은 드문 일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앉아서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기쁨의 아침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시 50 : 15)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불행이 닥치면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실망, 미움, 원망, 허전함, 슬픔의 감정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자살, 보복, 가출, 정신병 등의 새로운 불행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이러한 감정을 이길 뿐만 아니라 사랑과 용서, 소망과 용기,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기적도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나 몸이나 환경이 크게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띄우셨나이다"(11)라고 주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2)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5)라고 다윗은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불행이 때로는 큰 축복의 계기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 : 28)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언제나 좋게 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지 않았던 불행이 생길 때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맡기면 엄청난 행운이 곧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이나 야곱의 일생이나 요셉의 일생이나 다윗의 일생이 모두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들에게 부닥친 어려운 시련들이 모두 축복으로 바뀌었습니다.
3) 하나님의 영광과 나의 유익을 위한 불행도 있음을 알고 감사해야한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4). 사도바울의 몸에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이를 없애 주시도록 세 번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 : 9)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바울이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항상 하나님의 능력에만 의지하도록 그에게 가시를 머물러 두셨습니다(12 : 9 참고).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다닌 것이나 이스라엘 부근에 있는 큰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종종 침략한 것도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삶에 필요한 힘
마가복음 1 : 29-39
Craig A. Loscalzo
1. 예수님은 바쁜 전도생활을 하셨습니다.
이 날은 또 하루의 책임으로 가득 찬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날의 상당부분을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설교와 가르침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는 귀신들려 찾아온 사람을 치유 하셨고, 그리고 시몬의 집에 도착하자 시몬의 장모가 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병도 고쳐 주셨습니다. 또한 저물어 해질 때쯤에 사람들이 많은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병을 늦게까지 또 힘닿는 데까지 고쳐 주셨습니다. 얼마나 피곤한 날이었겠습니까 ! 게다가 예수님의 소문이 급속히 사방으로 퍼져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로 분주하게 보낼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또 그 다음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제대로 쉴 수 없다면 당신은 굉장히 곤욕스러워 할 것입니다. 알람시계가 울리면 벌떡 일어나 그 때부터 분주한 하루에 시달려야 합니다. 이러한 느낌을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가지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고 가르침을 얻기 위해 예수께로 오며, 또 옴으로써 그로 인해 생겼을 예수님의 심적, 정신적 피곤함을 가끔 잘 망각해 버립니다.
2. 예수님은 하루를 기도로서 시작 하셨습니다.
다음날 새벽, 오히려 미명에 바닥에 꿇어 앉으셔서 그 날에 있을 더 많은 책임과 설교, 가르침, 병 고침 등의 일에 대해서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어나시자마자 무릎을 들으시고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35절).
왜 예수님이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셔야만 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신데, 일어나자마자 왜 바로 일을 시작하지 않으셨을까요? 아침 식사 전에 설교도 하고 치료도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만약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아침 기도도 하지 않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면, 예수님이야 더 말할여지도 없겠지요. 이것이 바로 이 구절의 핵심입니다. 그 기도 속에서 하루의 준비를 하시고 예수님의 생애 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자 노력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화하심으로써 힘을 얻으신 것입니다 하루를 기도로서 시작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의 바쁘고 힘든 하루하루를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이 얼마 가지 않아 기진해 버리셨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3. 기도는 예수님께 가장 최우선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기도를 꼭 하시고 하루를 시작하셨는가는 어려운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능과 힘을 재충전하지 않고는 그의 힘든 사역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예수 님께 일, 친구, 가족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최우선적인 것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규칙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실 시간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만드셨습니다. 그 리고 기도생활에 자발적이고 규율적 이셨습니다. 또한 시간을 만드시고 조용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날을 맞을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찾아서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라고 말했을 때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저기서 도전도 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38절)고 하셨습니다. 그 날의 예수님의 일이 시작되었을 때 예수님은 벌써 준비가 되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에 필요한 힘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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