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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칭의를 설교하라!

공격이 2012. 12. 11. 17:42

현대는 칭의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다. 칭의에 관한 서적은 전 세계에 걸쳐 제대로 된 책이 10권 안 된다. 왜 그런가?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칭의를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성령의 조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칭의의 교리가 루터에게서 발견되었다. 물론 초대교회나 중세교회 때는 그 용어는 없었지만 실질적인 내용은 존재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 의해 철저하게 칭의에 관한 내용이 봉합되고 말한다. 행위구원이 그 자리를 대신차지한 것이다.

그럼에도 진리가 계시되어 루터가 칭의를 체험하고 멜랑히톤에 의해 교리화되면서 칭의교리가 종교개혁을 이끌어냈으며 개혁주의 교회의 토대가 되었다. 루터교가 성화가 빠진 칭의 교리를 너무 주장하게 되었다. 다행이도 칼빈에 의해 칭의와 성화의 교리가 동시에 주장되기 시작했다. 율법과 은혜가 전자에 의해서는 분리되었지만, 후자에 의해서는 통합되었다. 청교도는 철저하게 율법과 은혜 아래에서 성령의 조명을 구했으며 회개와 믿음을 굳건히 붙잡았다. 영국과 미국의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시에 이 교리는 크게 쓰임받았다.

하지만 그 이후는 소강상태에 머무르게 되었으며, 간혹 대부흥시에 칭의의 교리가 부각되었을 뿐, 점차 그 위세가 시들어갔다.

현대에 칭의 교리에 대해 그래도 주장하는 신학자는 필자가 알기에 대략 4명 정도다. 필립 입슨, 존 파이퍼, 톰 라이트, 맥그라스가 그들이다. 그 중에 필립 입슨과 존 파이퍼가 보수주의이며, 맥그라스와 톰 라이트가 중도주의 혹은 자유주의적이다. 전자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십자가의 은혜를 강조한다. 후자는 언약관계에 의한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강조점을 둔다. 필자가 보기에는 둘 다 수용해야 한다고 본다.

또한 칭의에 있어 은혜의 주입과 율법과 은혜를 동시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칭의를 설교하라

-필립 입슨 목사 특강-



저자 필립 H. 입슨(영국 런던 신학교 학장)

역자 신호섭(고려신학교 연수원 연구원)


I. 서론

내가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칭의 교리에 대해 강의할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큰 특권으로 생각합니다. 이 주제를 고찰하면서 우리가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목회하고 있는 목양지의 회중들이 당연히 참된 신자들이며 복음 진리에 정통해 있다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중들에게 반드시 복음적으로 설교해야 하며 주 예수를 믿으라고 설교해야 합니다. 참된 신자라면 누구든지 복음의 소식을 듣는 일에 대해 감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삶을 살라고 촉구하며 요구해야 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의롭다하시는 은혜의 복음에 기초해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는 과거 기독교회의 복음적인 목사들과 개혁자들에게 복음 설교의 가장 중대한 요소로 간주되었습니다. 특별히 종교개혁자들은 이 교리를 무척이나 중대하게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이 교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참된 구원의 보증을 제공하기 때문이며, 중세 시대에 교회에 살금살금 기어 들어온 수많은 거짓 교훈들과 성경의 남용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칭의 교리는 자의(自義)를 신뢰함뿐만 아니라 교회나 사제나 목사가 죄인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에 종지부를 찍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교회를 통해 행사되어지는 성례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영광스러운 성경적 교리는 우리들에게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절망하는 믿음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의 강물에 우리를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죄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으며 사망의 선고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우리는 저주받은 독방으로부터 걸어 나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보시고 죄 없다고 선언해 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의롭다고 간주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실제로 의로운 백성이 된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신분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실제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자리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전혀 법적인 허구(legal fiction)가 될 수 없는 실제적인 교리입니다. 결국 이신칭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흠 없고 점 없는 거룩한 삶이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어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선언되는 기독교회의 가장 영광스러운 복음 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II. 공격당하는 이신칭의 교리

불행하게도, 이 영광스러운 진리는 오늘날 수많은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개혁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신학자들 중에서도 칭의가 복음의 한 부분이 아니라고 주장하기까지 하는 실정입니다. 그 결과 작금에 칭의 교리에 대한 혼돈이 발생했으며 복음 진리는 더 이상 거짓 교훈들을 대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일 목사들이 이 칭의 교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 교리가 복음의 한 부분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한다면 어찌 칭의 교리를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칭의 교리를 공격하는 새로운 사조는 과거에 로마 천주교와 개신교를 확실히 구분했던 이 칭의 교리가 더 이상 양자간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그릇된 교회일치운동을 격려하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본 강의의 목적은 목사로 소명을 받아 훈련을 받고 있는 목사 후보생들이 의롭다하시는 은혜의 복음을 설교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칭의 교리에 대한 성경적이며 개혁주의적인 진리를 확실히 견지하기를 바라며 뒷짐을 지고 나태하게 구경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먼저 이 교리에 가해진 매우 교묘한 공격을 잘 간파해야 합니다. 이 공격은 신약신학자인 “톰 라이트”(N. T. Wright)가 저술한 저작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톰 라이트의 견해를 내 책 『The Great Exchange』1)에서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책이 출판된 1996년 이후 라이트와 다른 학자들이 저술한 다른 저서들에 기초해서 좀 더 설명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라이트를 선택한 이유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개신교적 배경의 사람입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를 했으며 1972년에 『The Grace of God in the Gospel』(복음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이라는 책을 영국 Banner of Truth 에서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둘째로 그는 복음주의 신학자로 잘 알려져 있고, I.V.P.사는 라이트를 통해 틴데일 주석시리즈인 골로새서와 칭의 교리에 대한 논문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셋째로 그는 신약 정기간행물과 웨스트민스터 대 수도원(Westerminster Abbey)의 수석 신학자이기도 합니다.

넷째로 그는 유능한 변증가이며,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과 신성 그리고 역사성을 강조하며, 신약문서의 확실성을 강하게 강조하는 인물입니다.

다섯째로 그는 신약성서 연구의 새로운 작업에 관심이 지대할 뿐만 아니라 그의 식견과 통찰력을 교회의 삶과 사역에 적용하는데도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톰 라이트는 그 어떤 신학자보다도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라고 알려진 사조를 대중화시킨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가 1997년에 저술한 『사도 바울이 정말 무엇을 말했는가?』(What St Paul really said?)라는 책에서 라이트는 기독교의 창시자는 예수가 아니라 바울이라는 윌슨(A. N. Wilson)의 통렬한 비평을 매우 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라이트는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그의 생각과 사상을 매우 그럴듯하고 호소력 있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최근 그가 쓴 골로새서와 갈라디아서를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만 이는 S.P.C.K.출판사에서 발행하는 『모든 이를 위한 바울』(Paul for Everyone) 이라는 주제가 붙은 매우 대중적이며 읽기 쉬운 주석의 시리즈 가운데 하나입니다. 나는 바로 위에 언급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라이트가 다른 신학자들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인물이라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라이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이해해야 하며 그러한 그의 주장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라이트가 주장하는 복음과, 칭의와 교회의 통일성은 무엇입니까?


1. 라이트가 주장하는 복음

복음적 개신교도들이 늘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라이트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복음의 한 부분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칭의가 복음에 의해 암시되었지만 복음의 정수에 포함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p132-133). 라이트는 바울이 당시 사람들에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를 설교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어쩔줄 몰라 하는 고린도 거리의 이방인들에게 선포된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복음적 메시지의 요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일부분임을 그의 개종자들에게 확신시켜주는 잇따르는 사역일 뿐이라는 것입니다(p94). 그러므로 라이트에 의하면 교회를 창조하는 것은 복음이며 교회를 정의하는 것이 칭의라는 것입니다(p151).


라이트에 의하면, 복음이란 예수라는 사람에 관한 선언입니다. 그것은 예수(Jesus)가 주(Lord)이시다는 선언을 뜻합니다(p154). 이 예수라는 메시지가 바로 참되시고 한 분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알려진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신 이 예수가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을 종결시키신 이스라엘의 메시아이며 온 세상의 구주시라는 것입니다(p60).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악의 권세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가 이루어졌으며 부활은 새로운 시대의 출현을 개막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선언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통해 사람들을 접촉하고 변화시키는 수단이며,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라이트에게 있어서 복음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신하의 의무를 다하는 권위 있는 명령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인간적인 충성을 도전하고 이기는 선언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라이트의 주장에 어떻게 답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사실상 이 주제에 대한 심각한 문제는 라이트가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고 있지 않는 것 그리고 그가 부인하는 것에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주(Lordship) 되심만을 강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Saviour) 되심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강조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자유주의 신학을 소유한 설교자들의 설교내용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새로운 복음주의 세대의 유력자들이 과거의 자유주의 설교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려 하는 것을 절대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예수라는 이름 그 자체에 복음의 정수가 완전히 집약되어 있지 않습니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예수께서는 이사야서 53장에 계시된 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으며 고난받는 구주(Saviour)이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법적 지위를 확보케 해 주는 용서뿐만 아니라 악의 권세로부터의 구원 역시 모두 다 복된 소식의 한 부분입니다.


마크 세이프리드(Mark Seifrid)와 다른 신학자들은 칭의가 복음 선언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정수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설교할 때 그의 설교는 이신칭의를 포함했습니다(행 13:38-39을 보라). 바울이 로마서에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필요한 그의 복음을 제시할 때 그는 복음의 요지가 이신칭의라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했으며(롬 1:16-17), 후에 바울은 이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지위를 확보케 해 주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설명했습니다(롬 3:21-26).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상기시킴으로 고린도 교회의 이방인들에게도 이신칭의 교리를 설교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고전 6:11). 그는 또한 그의 사역을 의의 직분(칭의의 직분)으로 정의하기도 했으며 그것을 정죄의 직분과 대조시키기도 했습니다(고후 3:9). 갈라디아 지역에서도 역시 복음의 진리는 이신칭의에 관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갈 2:14-16을 보라).


우리는 바울이 갈라디아 여러 지역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용한 복음이라는 용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것은 확실히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고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셨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갈 1:4; 2:20).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참된 복음은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에 관한 것입니다(라이트가 사용한 언어대로 표현하자면).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는 그 당시 유포되고 있던 거짓 복음을 대항하는 참된 복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올바른 신분인 이신칭의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15장에도 명백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행 15:1). 그러나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정 반대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구원받은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구원받을 것입니다(행 15:11).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엡 2장).


라이트가 고린도전서 15:3-8의 바울의 근본적인 선언을 인용하고 있지만 그의 책 어디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대신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죽으셨고 악의 권세를 이겨 승리를 쟁취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라이트는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 안에서 죄인들을 향한 그의 진노를 화목시키시는 그리스도의 형벌적이며 대속적인 죽음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칭의가 복음 메시지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매우 심각한 누락이며 고의적인 생략입니다.


2. 라이트가 주장하는 칭의

그는 칭의가 교회를 정의하는 것이지 복음이 교회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가 의미하는 칭의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할 때 칭의가 교회를 정의한다는 말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칭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언약의 회원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라이트는 지난 수백년 동안 사람들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오해했다고 말합니다. 라이트는 바울이 각 개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서는가를 다루지 않고 누가 언약공동체에 속해 있는가를 다루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편지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징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행하신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은 율법을 소유하거나 지킴으로 또는 어느 인종에 속하거나 할례나 음식법과 관계함으로 특징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 즉 예수가 주이시라는 고백이 그 표지라는 것입니다.


라이트는 스텐달(Stendahl)과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텐달은 바울의 주요 관심사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느냐가 아니라 구원역사의 흐름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면 이방인들이 언약 공동체의 회원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라이트는 로마서가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이방인이 될 필요가 없음을 이방인들에게 상기시켜주는 갈라디아서와는 정 반대의 목적으로 쓰여진 반면, 갈라디아서는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음을 알려주는 목적을 위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라이트는 옳은가?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가 그동안 일반적으로 볼 때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구원-역사적 요점에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본인도 역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목적과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부분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관심사인 것처럼 만드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칭의 교리를 언약적 회원성으로 정의하는 것은 더욱 잘못된 일입니다. 언약백성의 회원성은 양자(adoption)와 더불어 칭의가 주는 여러 가지 결과 중 하나일 뿐입니다. 콜린 크루즈(Colin Kruse)는 1996년 아폴로(Apollos) 출판사에서 펴낸 그의 책 『바울, 율법과 칭의』(Paul, the Law and Justification)에서 이와 동일한 견해를 제시합니다. 라이트와는 정반대로 크루즈는 칭의가 사람들이 언약 공동체로 진입하는 통로와도 같다고 말합니다.


라이트의 새로운 통찰력이 그동안 설교자와 주석가들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비-역사적으로 다룬 것을 교정해준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본문에 나타난 개인구원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설교해야 할 것입니다. 위에 언급한 이러한 새로운 관점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여러분들이 본문에 서구적 개신교 해석을 부과하도록 해야만 한다는 죄책감이 들도록 그것들을 용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과 하나님의 구원 계획 하에서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위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서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올바른 법적 신분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브레이(G. Bray)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개인의 중요성을 너무나 간과한 나머지 라이트는 사도가 의미하는 바를 왜곡했으며 너무나도 추상적인 개요를 산출했습니다(Justification: The Reformers and Recent NT Scholarship in Churchman Vol. 109, No.2 1993, pp121-122).


3. 라이트가 주장하는 교회의 통일성

라이트는 칭의가 우리가 이제까지 생각해왔던 의미로서의 칭의가 더 이상 아니기에, 또한 바울이 인간적인 노력과 행위를 통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사람들을 고발하는 의미로 칭의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칭의 교리를 이용해 선한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고발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사실상 그의 견해에 따르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전혀 우리처럼 생각하지 않으며 심지어 로마 천주교도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사실상 개신교나 로마천주교나, 정교회 신학자들 중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설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찾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의 평생에 듣던 개신교 칭의 교리에 관한 최고의 강해와 주해는 교회일치운동을 위한 회합에서 한 예수회의 수도사가 전달한 강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p116).


라이트의 입장에 대한 우리의 반응

이마도 이 예수회 신학자는 칭의 교리에 대해 개신교가 동의하고 수긍할 수 있는 진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그들이 주장하는 진술들이 담겨 있는 소책자를 읽고 그들의 실상을 보면 그들이 전혀 성경적 칭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라이트는 행위중심의 종교를 조장하고 선호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 본성의 특징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한 기독교 안에 소속되어 있다는 진술이 옳은 진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드시 그들이 어떤 예수를 부르고 신뢰하는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전혀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예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1:4).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예수에 대한 진리를 예수 자신과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진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어떤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교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교리는 교회일치운동의 논의 속에서 결코 무시되거나 잊혀져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루터는 바로 이 칭의 교리를 교회가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가장 “우선되고 주요한 믿음의 조항”이라고 간주한 것입니다.


요한 칼빈 역시 “미래 가견적 교회의 번영과 안정은 전적으로 이 교리에 달려 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 교리의 순수성이 조금이라도 훼손된다면 교회는 매우 심각한 부상을 당할 것이며 파멸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칭의 교리에 대한 라이트의 정의에 의하면 이신칭의 교리는 더 이상 복음의 주요 교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라이트의 사상이 철저히 그릇된 것이며 오히려 종교개혁자들의 이해가 더욱 성경적임을 확실히 믿습니다.


사실 마틴 루터가 교회 내에서 행해지고 있던 면죄부들의 판매를 포함한 다른 그릇된 사상들에 대해 대항하고 공격한 것도 그의 가슴 속에 이 칭의 교리라는 진리가 불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충족성을 부인하는 이 더럽고 타락한 관례와 행실들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새천년에도 여전히 그것들을 고안해 낸 종교가 선한 행위를 하는 신실한 로마 천주교인들에게 특별한 면죄부를 계속해서 수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순수한 성경적 교훈을 들어야 하며 이 교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와 그 구성원들인 성도들을 이 구역질나는 오류로부터 보호해야 할 것입니다.


III. 칭의 교리의 진수는 무엇인가?

오늘날 복음의 여러 다른 진리들이 공격을 당하고 재해석될 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칭의 교리만이 현 세대에 가장 시의 적절하게 설교되고 그것들을 교정해 줄 교리가 될 것입니다.

이 성경적 칭의 교리의 진수는 몇 가지를 전제하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의와 은혜로 계시된 하나님의 주권

사람들은 세상에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오직 참되고 살아계신 한 분 하나님만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모든 인류들은 개인적으로 각각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주권적이시며 하나님께서 법칙들을 제정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책임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의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난 20세기 성경신학은 하나님의 존재나 속성이나 성품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 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추론적이며 사색적인 헬라 사상을 전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활동이나 사역을 강조해 왔습니다. 슬프게도 지난 과거 역사상에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에 대해 계시하고 있음을 그들은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시 119:142). 심지어 바로까지도 여러 가지 재앙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라고 고백해야 했습니다(출 9:27). 최근에 카슨(Carson)과 오브라이언(O''''Brien) 그리고 세이프리드(Seifrid)에 의해 편집되어 베이커(Baker)에서 『출판된 칭의와 잡색으로 얼룩진 언약적 율법주의』(Justification and Variegated Nomism)에서 세이프리드는 의라는 단어는 언약적 정황 속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과 우리 회중들에게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의는 하나님 앞에서 용인을 받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의라는 사실을 늘 상기시켜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절대하신 분이시며 하나님만이 궁극적 옮음의 표준이십니다. 그의 율법과 그의 독생자 예수는 하나님의 성품과 이 완전하고 궁극적인 표준을 계시해줍니다. 죄란 이 의로우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의는 엄청난 공포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잠 17:15).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을 행하시는 것은 그 자신의 성품과 자신의 율법에 비추어보면 불합리한 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보기에 불가능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로운 속성을 타협하거나 그것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신 채 위대하신 사랑으로 죄인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의와 은혜가 동시에 표현되고 계시된 유일한 곳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이었습니다. 복음은 불의한 죄인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의를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신 것입니다(롬 3:26). 이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표현된 곳이 바로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2. 엄위로우신 심판자 하나님

1961년 영국 Banner of Truth에서 출판된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의 고전『칭의교리의 진수』(The Doctrine of Justification)라는 저서의 개요에서 짐 패커(J. I. Packer)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 이전 시대의 이방인들과 같이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창조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나 끊임없는 아버지 하나님의 부성적 관심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40여 년이 지난 후인 지금에도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이러한 옛 현대인들과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복음주의자(cf. Tyndale Paperback, Religion, 1966)로 간주하는 캐나다의 성공회 주교인 로버트 브로우(Robert Brow)는 1990년 2월 19일자 Christianity 라는 잡지에서 새롭게 형성된 복음주의를 옹호하는 글을 게재했습니다. 이 글은 복음주의의 대 방향전환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복음주의로부터 가장 첫 번째로 제거해야 할 것은 개혁주의 신학과 관계된 구원에 대한 법정적 이해라고 주장합니다. 구원이란 죄인이 의롭다 칭함을 받는 법정의 정황에서가 아닌 사랑스러운 아버지가 그의 자녀들과 관계하는 가정의 정황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에도 매우 잘 알려진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선두주자인 맥그라스(Alister McGrath) 역시 16세기 종교개혁의 법적 언어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야 하며 칭의 교리를 20세기 서구사회에 필요한 언어로 수정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심판자/죄인을 강조하지 않고 언제나 아버지/아들 관계의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배역적인 관계를 이해하고 설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칭의의 복음을 심각하게 훼손시킬 것이며 처절한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진노

저는 패커의 말을 다시 한번 인용하고자 합니다. ‘현대 개신교도들은 인간이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 아닌 심판자로서의 하나님과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기에 게으른 것처럼 하나님께서 악을 싫어하시는 의를 소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 역시 믿지 않으려 합니다. 이 악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자들에게 정확히 임하는 복수와 벌이며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법적 진노 아래 처하게 만드는 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칭의의 복음이 아니고서는 이 진노로부터 죄인을 구원해주는 설교의 기초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신학자들 사이에는 잃어버린 자들의 최종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지고 장난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심판』(Christ and the Judgement of God; Marshall, Morgan & Scott, 1986)이란 책을 쓴 스티븐 트래비스(Steven Travis)는 바울에게 있어서 형벌과 복수로 특징짓는 신적인 심판 사상은 매우 사소하고 주변적인 것이지 중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cf. Atonement Today ed. John Goldingay SPCK 1995). 그는 심판과 진노의 하나님 보다 인간의 선택에 따른 결과로서의 재앙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행위에 따른 결과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며 순종치 않는 모든 인간이 경험해야 하는 분명하고 확정적인 하나님의 진노로서의 지옥을 명백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복음에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 복수하시는 분이시라고 했습니다(살후 1:7-9).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와 지옥을 의심하는 것은 결국 칭의 교리와 십자가에서 행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심각한 재앙을 양산할 것입니다.


4. 인간의 죄와 비참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심리학자라는 새로운 목사가 탄생한 시대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죄악된 행위에는 객관적인 면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행위를 하나님께 결산해야 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양심은 완전히 잠에 빠져 있으며 세속주의에 처해 있는 양심은 각성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또한 실제로 죄인임을 교훈해야 하며 전혀 소망이 없는 비참한 처지에 있음을 알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아담 안에서 모두 범죄했으며 실제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김으로 범죄했습니다. 그 결과 사망이라는 선고가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실 타락한 죄인들은 이러한 메시지를 듣기 싫어하며 많은 설교자들과 목사들은 이러한 진리들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칭의 교리에 관심이 없는 이 사회를 보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만일 사람들이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죄인들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의롭다하시는 은혜를 감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타락한 양심을 찔러줄 수 있는 설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설교가 오순절 성령강림의 시대로부터 기원된 모든 복음적 부흥의 시기에 발생했던 설교입니다.


현시대는 죄에 대한 하나님 중심의 견해를 경시하는 경향이 유행하는 시대이며 그것이 인간과 그 환경과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엑스포지터리 타임스』(Expository Times; Feb. 2000, vol 11, No 5)에 “죄란 정말 중요한 문제인가?”라는 제하의 죄에 대한 기사가 게재된 적이 있습니다. 그 잡지에 기고한 요오크의 토마스(Paul Thomas of York)는 죄가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기 때문에 죄가 정말 중요한 문제인가?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오히려 죄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보다 그 죄가 우리에게 무슨 영향을 끼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만일 이 대안이 수용된다면 죄는 여전히 심각한 정도의 상태로 간주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왜곡시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코넬리우스 플란팅가(Cornelius Plantinga)의 책 Not the Way It''''s Supposed To Be(Apollos an imprint of IVP, 1995)가 자신의 견해를 지지하는 매우 유용한 책이라고 평가합니다. 플란팅가는 모든 죄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중심의 요점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죄가 평강을 범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것은 평화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의 것을 훼손시키기 때문입니다. 나는 코넬리우스 플란팅가가 새로운 복음주의 세대가 요오크의 폴 토마스의 견해를 추종하도록 격려하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죄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며 그의 명령을 어긴 행위임을 반드시 그리고 명백하게 설교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사람들의 비참함과 소망 없음을 알려주고 깨닫게 해야 합니다. 알란 스팁스(Alan Stibbs)는 우리 모두에게 하늘이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믿는 펠라기우스와 같은 존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전혀 도울 수 없는 또한 전혀 도움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자들을 기꺼이 도우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칭의의 진수입니다. 그들이 의롭다고 생각하며 다른 이들을 멸시하며 자신들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의롭다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죄인 세리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놀라움입니다.



5. 그리스도의 대속적이며 형벌적 죽음의 본질

알란 스팁스(Alan Stibbs)가 한 말을 다시 인용해야 하겠습니다. “종교개혁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이며 대속적인 속죄 사역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의 중요성과 놀라움이 동시에 인식되고 강조된 사실은 전혀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다. 이 두 교리는 서로 상호의존적이며 보완적이다. 이신칭의 교리는 필수불가결한 신적 제정의 기초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교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패커(Packer) 역시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구원은 대속이며 교환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시키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죄인들에게 전가시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율법의 요구와 하나님의 요구가 만족되며 죄로 말미암는 형벌은 공정한 방법을 통해 죄인들에게 시행되지 않는 것이다. 공의는 만족되었고 그렇게 함으로 자비는 승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의 칭의에 있어서 죄인들에게 임하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와 갈보리 상의 그리스도에게 임하는 그들의 죄의 전가는 함께 속해 있는 것이다. 만일 오늘날의 현대 복음주의 개신교가 그렇게 하듯이 십자가의 형벌적 해석이 거부된다면 의의 전가가 자리할 곳은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죄인들에게 임하는 의의 전가의 기초가 없는 칭의는 단순히 법적 허구(legal fiction)가 될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도덕적 질서를 전복시키고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본성을 범하는 하나님에 대한 제멋대로의 해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복음주의와 개신교는 형벌적이며 대속적인 해석을 거부함으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복음을 손상시키고 평가절하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짓이 현대 복음주의자들이 저지르고 있는 해괴한 일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오늘날의 속죄』(Atonement Today)라는 심포지움을 통해 완전히 부인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값이라고 하는 것은 형벌이 아니라 비용과 관계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라이트는 그의 최근 저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위무(慰撫)시키는(Appease) 그리스도의 사역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동안 전통적으로 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지원하고 증거해주었던 본문들은 오늘날 다시 새롭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 본문들 중에 가장 명백한 본문은 갈라디아서 3:13입니다. 그러나 라이트는 본문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를 망명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저주를 종결하시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의 적실성을 인식하고 감사해야만 하는 진리라면 우리는 반드시 형벌적이며 대속적인 희생제사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반드시 견지하고 전파해야 합니다. 칭의는 결코 텅빈 주장이 아니요 법적 허구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인의 자리를 대신해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화목제사에 기초해 있기 때문입니다.


6. 칭의 교리가 주는 지대한 유익

만일 우리가 칭의 교리의 완전한 중요성과 그 함축적 의미를 설교하는 일에 나태하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기업과 유산의 풍성함을 인식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칭의 교리가 사람들의 심장을 사로잡는다면, 칭의 교리가 진심으로 이해된다면 우리의 기도회와 우리의 예배는 진실로 역동적인 모임이 될 것입니다.


이신칭의에 관한 진리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은 주어진 막대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된 기쁨의 근원과 자족의 근원을 아는 것이 됩니다.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 앞에서 용인을 받고 인정을 받기 위해 몸부림 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축복입니까! 의심과 두려움이 밀려올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때때로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의심이 들 때 “의롭다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롬 8:33)! 이 교리는 알란 스팁스(A. M. Stibbs)가 말한대로 개인구원의 비밀이요, 영적 부흥의 비밀이요, 하나님의 참된 교회의 비밀입니다(EQ Vol.24. 1952. p 157).



7. 결과적으로 따르는 의무들

이 새롭게 의로워진 칭의의 상태에서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성화교리는 이런 의미에서 칭의 교리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믿는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새 생명의 표지이자 회개와 순종의 표시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욕구를 제공합니다.


야고보 사도 역시 이점을 매우 강조했는데 이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는 신약성경 저자 가운데 유일하게 칭의와 관계해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표현을 한 저자입니다(약 2:24). 그러나 그가 야고보서에서 한 표현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설명한 내용들과 완전히 모순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거짓된 믿음을 공격하면서 참된 믿음은 반드시 그 열매와 결과를 양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는 사실들만 인정하는 믿음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은 귀신들도 소유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의로 영접하는 믿음은 의로운 삶을 양산합니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가 구원받는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야 할 행위라고 주장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그는 다른 성경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의미인 ‘의롭게 하다’라는 단어를 ‘의로운 자인 것을 보여주다’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마 11:19; 눅 16:15; 롬 3:4).


우리의 믿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는 사람이 변화되었다는 표시이며 우리가 의로운 사람을 살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진술하는 바울의 진술은 야고보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한 행위들은 우리의 칭의에 있어서 사실 아무런 역할이나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 의로운 상태는 완전한 선언입니다. 그것은 종말의 최종 심판 때까지도 견디는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불완전한 것은 우리의 성화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의로운 자로 선언되고 불러주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요구받는 것입니다.


V. 결론

우리는 현대 사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물론 설교자와 목사로서 그리고 교회의 직원으로서 많은 책들을 읽어야 하고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고 옳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 부는 창공에서 같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힘차게 날개 짓을 계속하는 새와 같이 우리 역시 이러한 시대 사조 속에서 우리의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 지적인 날개 짓을 계속해야 합니다. 새로운 사상과 사조와 더불어 씨름하며 선과 악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사탄으로 하여금 칭의 교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위와 관계 있다는 확신을 평가절하 하거나 그것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을 통하여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확신을 평가절하 하는 그 어떤 사상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출처 : 무극사랑교회
글쓴이 : 김광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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