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묵상과 기도

[스크랩] 트윗 모음 18, `불교에서 말하는 거랑 별로 다를 게 없네요...

공격이 2012. 7. 17. 13:09

트윗 모음 18, '불교에서 말하는 거랑 별로 다를 게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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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교에서 말하는 거랑 별로 다를 게 없네요." 불교 신자가 교회 방문 후 남겼다는 소감이다. 윤리적인 삶을 독려하거나 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설교는 비신자에게 오히려 식상하다. 지금은 기독교만이 가진 사실적, 역사적 증거들이 적극 제시되어야 할 때다.


2

사회의 문화패러다임이 바뀌면 전도접촉점도 달라진다. 내게 편하고 익숙한 방법으로만 전도하려 하기보다 내 주위의 세상사람들이 가진 문제나 고민, 필요가 무엇인지를 유심히 살펴보려는 노력 또한 전도의 한 과정이다. 접촉점만 잘 살려도 전도는 의외로 쉽다.


3

사람들은 5분 간격이 아까워 바로 눈앞에서 놓친 지하철을 아쉬워한다. 땅을 치며 통탄할 때도 있다. 이땅에서 수많이 주어진 영생 기차의 배차 타이밍을 놓치고 끝내 탑승 기회를 다 날렸구나 알게 될 때는 어떨까. 문 닫고 떠난 지하철은 후진하지 않는다.


4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의 첫번째 반응. "아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곳이 있을 수 있나!" 두 번째 반응. "정말 내 몸이 한뜸한뜸 생생히 체감하는 이 고통을 영원히 당한단 말인가!" 마지막 반응이 가장 가슴 아프다. "예수 믿는 게 그리도 중요했나?"


5

이 땅의 하루하루가 사실 얼마나 값비싼가. 영원에 비하면 이 땅의 70, 80년은 눈 깜짝할 사이다. 그래서 하루하루의 가치가 그 영원만큼이나 무한하고 영원하다. 하루는 길고 1년은 짧다? 아니다. 하루도 짧고 1년, 10년, 100년도 너무 짧다.


6

일도 중요하지만 더 소중한 것은 나의 변화다. 누가 봐도 귀한 일을 감당하는 사람도 그 일을 통해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지 못한다면 자신에게 기쁨이 없다. 일하면서 얻어야 할 가장 큰 보람이나 평가는 나의 성숙이다. 그때 그 일도 진짜 이웃사랑이 된다.


7

한 노인이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가장 깊은 곳은 눈을 감은 바로 그 눈꺼풀 깊이요 그 어둠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소경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이런 것이 언어 유희다. 세상은 이런 식의 그럴듯한 말놀이로 넘쳐난다.


8

묵상을 해오다보니 나는 설교를 들으면서도 주석이나 참고자료에서 나온 대목, 묵상에서 나온 대목이 대충 구별된다. 설교자의 담백한 묵상에서 나온 메시지가 마음을 움직이는 강한 변화의 감동과 영향력을 끼치는 것 같다. 하나님은 묵상을 통해 말씀하신다.


9

말씀으로 영혼을 깨우는 순수한 복음전도(evangelism)에서 더 나아가 세상을 복음으로 바꾼다는 복음화(evangelization)가 정말 필수적이며 가능한가에 회의감이 늘어간다. 적어도 복음의 체험 없이 사회참여에 과도히 매달린다면 속는 것이다.


10

성경은 사회 변혁보다 개인의 거룩한 삶과 구제를 더 중시한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막 12:17)라는 슬로건을 주셨고, 야고보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과 소외층 구제'(약 1:27)를 참된 경건으로 꼽았다.


11

유사그리스도인. 청교도설교자 매튜 미드가 만든 용어다. 기도에 열심있고 은사 체험에다 사모함과 지혜도 있지만, 예수의 생명 없이 종교적 양심에 따른 자기의일 수 있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 10:2).


12

차분히 다가앉는 중심 없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조급한 마음은 기도에 장애가 된다. 단순히 하나님을 기뻐하며 그분 자체를 묵상하며 그분께만 예배하려는 순결한 소원으로 그 보좌 앞에 오래 머물다보면 하나님께서 기도의 언어를 주시고 자신을 주신다.


13
"사람들에게 다 서라고 명령하는 숫자는? 다섯!" 요즘 딸은 틈만 나면 난센스 퀴즈를 낸다. 자작품도 열심히 생산중이다. 세상을 거꾸로 보는 데서 통쾌감을 느끼는 아이의 심리. 뻔한 답을 거부하는 걸로 고정관념에 물든 세상을 도전하는 거라면 좋으련만.


14

부부는 서로 마음이 나뉘는 일 없이 일체감을 갖도록 애써야 한다. 건설하려는 노력 없이 거저 지어지는 부부관계는 없다. 방치하면 부부는 서로의 단점을 부정적으로 공유하는 쪽으로 말끔하게 하향평준화된다. 싸움이 종종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되는 이유다.


15

사람은 죽고 나면 모든 관계가 끊어진다. 시체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닌 물건처럼 취급된다. 몸은 곧 썩어 없어질 단백질 덩어리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채 죽으면 짐승처럼 된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16

대통령도 남 몰래 지은 죄가 있으면 끝까지 추적해 벌하는 게 법이다. 법 앞에선 남녀노소 지위고하가 없다. 세상에서 못 걸러낸 죄도 우주법정에선 다 걸린다. 양심이 각자의 내부 고발자니까.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민 32:23).


17

인간의 영혼에 붙은 죄는 칼로 끊어낼 수도 끌로 긁어낼 수도 없다. 선행으로 죄를 상쇄시킬 수도 없다. 죽은 뒤 지옥에서 그 죗값을 일일이 다 갚아야 한다.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6).


18

인간이 무엇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이런 상상마저도 불경스럽다. 하나님께는 완전한 죄인 아니면 완전한 의인밖에 없다. 심판날에 자기의로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없다. 예수님의 의를 나의 의로 여겨주시겠다면 바로 지금 덥썩 받아야 하지 않을까.


19

"하나님!" TV 드라마에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 들리길래 깜짝 놀랐다. 아니나 다를까 부처님 이름도 곧이어 등장했다. 하나님을 사람과 동격으로 만드는 방법도 다양하다 싶었다. 세계 4대 성인 석가 자신도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 했건만...


20

확실한 진리가 하나 있기에 유사진리들이 있다. 가짜만 있고서는 또다른 가짜가 존재할 수 없다. 가짜의 존재 근거는 진짜다. 파스칼은 "진짜 다이아몬드가 있기에 가짜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말했다. 진짜 신, 진짜종교가 있기에 가짜 신, 가짜종교가 있다.


21

이슬람교의 신 알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며 전능하지만 인격적이진 않다. 알라의 뜻은 사랑이기보다 절대 어겨선 안 될 운명이다. 이 율법적 세계관에는 죄에 대한 대속개념이 없고 스스로 선행을 쌓아 정죄를 피할 도리뿐이다. 이슬람교는 기독교와 다르다.


22

이슬람교의 율법적 선행 쌓기나 힌두교의 공덕과 요가를 통한 윤회의 사슬 벗기, 불교의 고행과 참선에 따른 해탈은 모두 인본적이라는 게 공통점이다. 인간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진 채 자기해방과 구원을 이루려 한다면 참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요원하다.


23

세상사람들이 죄다 하나님 앞에 아무 자격도 내세울 게 없지만 딱 한 가지 자격만은 확실하다.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격요건은 딱 하나, 죄인이면 된다. 죄인이 아닌 자, 그래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 자만 자격 미달이다.


24

여보(如寶)는 '보배와 같다', 당신(堂身)은 '내 몸과 같다', 마누라는 '마주보고 누워라', 여편네는 '옆에 있네'라는 뜻이란다. 부부간 친밀함은 삼위일체 하나님 서로간의 친밀함을 상징한다. 사람들이 모든 관계에서 추구하는 친밀감도 마찬가지다.


25

"나는 여전히 눈물 나고 고독하고 불행함을 느껴요." 한국 최고의 문학가 중 한 사람의 고백이다.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고 나서도 사람은 결코 만족이 없다. 외적인 어떤 것으로 영혼이 만족된다는 사람은 잠시 착각해서거나 이 작가처럼 진실하지 않아서다.


26

인간이 신을 떠나 뿌리없는 존재로 방황하는 것이 꽤 멋있어 보인 때가 있다. 자기결핍, 자기연민, 고독. 이런 단어에 인간의 가치가 숨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지옥 고통의 불씨요 위험천만한 외도다. 지옥에는 낭만이 없다.


27

사람들은 심판이나 지옥에 대해 말하면 싫어한다. 그러나 어둠이 없으면 빛을 모른다. 고통의 시간이 지나야 기쁨이 있다. 이미 믿는 자들은 지옥 심판에 대한 이야기에 감사가 새로워져야 맞다.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사 9:1).


28

내가 누군가에게 한 말은 없어지지 않고 부정적인 열매로나 긍정적인 열매로 자란다. 내가 한 말이 심판받을 때 강력한 증인이자 참고인은 바로 그 열매들이 아닐까. 말로 낸 상처는 말로 아물어진다. 사과하고 화해하는 데 열린 삶은 생각보다 아주 중요하다.


29

주의 임재의 달콤함을 맛본 사람은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걸 잘 안다. 임재의 능력이 믿음의 능력이며 주를 사랑하는 것이 나의 힘이요 지혜가 된다. 한눈 팔 필요가 없다. 자기 힘과 지혜와 처세로 신앙생활하는 것보다 더 까다롭고 힘든 일도 없다.


30

기도는 어제를 돌아보며 감사거리를 찾고 오늘을 내다보며 간구거리를 찾는 것이다. 기도의 자리는 항상 어제와 오늘 사이에 있고 감사와 간구는 그 어제와 오늘로 삶을 직조해가는 씨줄과 날줄이다.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계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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