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교회영성묵상

성경적인 지역교회와 한국교회

공격이 2011. 12. 16. 15:09

 

- 성경적인 지역교회와 한국교회 -

 

 

신약성경에는 교회라는 단어가 115번 나오는데 이들 중 20회는 구원받은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통칭하는 교회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 이 20회는 비가시적인 우주적인 전체 교회, 즉 오순절 날 교회가 탄생한 이후부터 휴거될 때까지의 모든 구원받은 성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나머지 95회는 믿는 사람들로 구성된 지역의 회중, 즉 지역 교회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지역 교회는 일정 지역에 있는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을 말한다(<한국 침례교의 신학적 특성>, 침례신학대학교, 124쪽).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에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 하리라, KJV(마 16:18)”고 말씀하시며 여기서 처음으로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여기서 교회라는 단어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이 복음시대에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은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을 의미하는 ‘우주적인 교회’를 가리킨다. 또한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고 말씀하면서 교회에 대해 두 번째로 언급했는데, 여기서 언급된 교회는 ‘지역 교회’를 가리킨다.

 

이처럼 예수님은 두 차례에 걸쳐 교회에 대해 언급했는데, 첫 번째는 ‘우주적인 교회’이며 두 번째는 ‘지역 교회’인데, 이같이 언급된 순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우주적인 교회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지역 교회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인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마태복음>, 어니스트 타담, 한국엠마오성경학교, 102쪽). 왜냐하면 서두에 언급했듯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교회라는 단어는 ‘우주적인 교회’뿐만 아니라 ‘지역 교회’의 두 가지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부터 먼저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개척과 그 시작의 중요성, 그리고 교회 개척에 관한 몇 가지 모델과 지역 교회의 구성에 관한 성경 말씀”에 대해 살펴 보고, 그 후에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진리(교리)에 대한 ‘실행적인 측면’에 대해 알아 보자.

 

신약성경에는 여러 지역에 지역 교회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테면 예루살렘교회· 안디옥교회· 고린도교회· 갈라디아교회· 에베소교회· 빌립보교회· 골로새교회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여러 지역 교회들을 합쳐 30개가 넘는데, 이 교회들 전부가 다 ‘순회 사역자’들에 의해 세워졌거나, 세워지고 나서 그런 사역자들에 의해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순회 사역자들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인, 바나바, 실라, 디모데, 디도, 에바브라 등이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 등 12사도도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위해 보냄을 받았다(<유기적 교회 세우기>, 프랭크 바이올라, 대장간, 143~144쪽).

 

신약성경 에베소서 4장 11절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한 다섯 가지 유형의 은사자들, 즉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자· 교사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은사자들은 교회를 개척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사명은 ‘전체 교회’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한 지역 교회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영구적인 은사자들인 복음 전도자와 목자와 교사는 교회를 개척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한 지역 교회에 국한하지 않고 전체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일꾼들인 것이다.(<신약 교회의 조직>, 도날드 노비, 전도출판사, 85쪽).

 

저명한 성경 주석가인 윌리암 맥도날드도 그의 저서에서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은사자들은 한 지역 교회에서 평생 직분자로서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교회가 스스로 그 사역을 감당할 수준이 되도록 세우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따라서 그 교회가 자립하면 그들은 순회 사역자로서 타 지역으로 옮겨갔다”고 언급했다(<사도행전>, 윌리암 맥도날드, 전도출판사, 146쪽).

‘모임에 대한 성경의 원리’의 저자인 알프레드 깁스는 그의 저서에서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특별한 은사자들이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일을 스스로 해 나갈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을 세워준 후에 다른 일터로 이동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을 세워준 후에는 가능한 한 짧은 시간 안에 다른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해야 한다. 한 지역에서 얼마동안 머무느냐가 아니라 그 지역에 머무는 목적이 무엇이냐에 있다”고 서술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은사자들은 어떤 한 장소에서 일생을 보내려는 타고난 성향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늘 자기 자신을 이동성이 있는 상태로 두어야 한다. 즉, 때가 되면 언제든지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경계해야 할 또 하나의 위험은 성도들이 자기 없이는 잘 해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가 없으면 성도들 숫자가 줄어들고 교회가 산산조각이 나지나 않을까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잘못된 것이며, 그리고 그와 같은 은사들은 전문적인 교육이나 훈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모임에 대한 성경의 원리>, 알프레드 깁스, 전도출판사, 87~88쪽).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가장 흔한 교회 개척의 방법은,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가 혼자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기존 교회가 새로운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교회에서 부목사가 교회를 개척하려고 하면 그 교회의 담임목사와 갈등을 빚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 신자들 중 일부가 개척되는 교회로 이동하는 것을 담임목사가 꺼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들의 ‘교회론’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개교회의 성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성장인데도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교회개척>, 목회와 신학 편집부, 두란노 아카데미, 160쪽).

대개 한 사람의 목사나 전도사가 고생 고생하며 교회를 세우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주인 행세를 할 가능성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혼자서 교회를 개척했기 때문에 은연 중에 자신이 교회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의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비성경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게 된다. 그리하여 교인 수가 불어나 교회가 커지면,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이 교회의 우두머리이자 교회의 주인이 되기 십상이다. 이런 자들이 나중에 교회가 파탄이 나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자기를 반대하는 자들을 모조리 출교시키고, 자신은 끝까지 남아 주인 행세를 하거나, 아니면 상황이 불리할 경우에는 교회를 팔아 먹거나 자기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시키곤 하는 것을 주변에서 적지 않게 목격하게 된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3장 6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 개척’의 사역을 밭을 경작하는 것에 비유를 들고 있다. 이처럼 교회 개척자는 씨를 심는 사람이다. 교회 개척자는 교회를 시작한 사람으로서 교회가 태동하고 자라나도록 복음의 씨를 심는 사람이다. 성경은 시작에 상당한 강조점을 둔다. 그 이유는 영적인 세계에서는 시작이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도 그 시작이 교회의 질뿐만 아니라 운명도 결정하게 되는데, 이처럼 교회의 시작이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유기적 교회 세우기>, 21~22쪽).

이제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시작’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시작은 상술했듯이 교회를 세우기 위한 다섯 가지 유형의 은사자들에 의해 교회가 개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신약성경에서는,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인 바나바, 디모데, 디도 등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음을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교회의 기초적인 은사자들인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영구적인 은사자들인 복음 전도자들과 목자들과 교사들에 의해 지역 교회가 세워지고 있고, 이런 방식이 성경적임을 알 수 있다.

상술했듯이 지역 교회는 신학교를 졸업한 한 사람의 목사나 전도사 또는 전문적인 교육이나 훈련을 받은 한 사람의 사역자(일꾼)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 성경적이 아님을 살펴보았다. 지역 교회를 세우는 다섯 가지 유형의 은사자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주신 은사자들이다(엡 4:7). 이 가운데 복음 전도자는 복음을 전해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활동을 주로 하며, 목자들은 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하며, 교사들은 성경의 올바른 교리를 가르친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 새로운 교회가 개척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주님의 이름 아래 모임>, 노먼 크로포드, 기둥과 터, 121쪽).

 

상기의 방식이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범적인 ‘안디옥 교회’의 모델 방식이다. 이 방식은 사도적 일꾼들이 새로운 도시들에 교회들을 개척하기 위해 안디옥 교회로부터 파송된다. 우리는 사도행전(13:1~20:38)에서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안디옥에서 파송되어 갈라디아 지방과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교회들을 세운 것을 볼 수 있다. 안디옥 모델에 의하면, 사도는 교회의 기초를 놓으려고 한 곳에 3개월 또는 6개월 정도 머문 후 그곳을 떠난다. 그 후 교회의 성장을 돕기 위해 동역자들을 파송하거나 다시 방문하기도 한다. 그러한 교회들은 나중에 장로들이 생겨나 성숙한 교회가 된다. 이러한 안디옥 교회 모델이 모범적인 교회 개척의 방식이다(<유기적 교회 세우기>, 34~37쪽).

 

다음으로 예루살렘교회의 모델이 있다. 사도행전 8장 1절에 “그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대한 큰 박해가 일어나 사도들을 제외하고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의 지역으로 널리 흩어지니라”고 쓰여 있다. 이처럼 한 무리의 사도적 일꾼들에 의해 큰 교회가 하나 생겨나고, 몇 년 후에 박해로 말미암아 다른 지역에 새로운 교회들이 ‘이식’ 또는 ‘이주’에 의해 증식하여 생겨나는 방식이다. 예루살렘교회가 4~5년간 계속하여 성장한 후에 박해가 시작되자, 많은 성도들은 예루살렘에서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서 새로운 교회들이 생겨났다(행8:1~8).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흩어져서 새로운 교회들을 세운 성도들은 예루살렘교회에 있을 때 유기적인 교회 생활을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그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경험을 다른 지역으로 가지고 갔던 것이다. 그리고 새로 생겨난 교회들은 이후에 사도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12사도는 새로 개척된 교회들을 순회하며 씨에 물을 주고 잡초를 제거해 주었다(행9:32~11~30). 그들은 새로운 교회들이 세워지는데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그 교회들 안에 계속 머무르거나 교회를 좌지우지하지도 않았다.

상술한 것처럼 예루살렘교회가 성장한 후에, ‘이식’ 또는 ‘이주’에 의해 증식된 새로운 교회가 생겨났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어느 한 지역의 교회가 성장한 후, 신자들 수가 많이 늘어나면 이식 또는 이주에 의해 다른 지역에 새로운 지역 교회가 생겨날 수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모델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앞의 책, 30~31쪽).

 

국내에서는 상기와 같은 교회 개척 방식을, 소위 ‘분립 개척’ 방식이라고 일컫는다. 이 방식은 기존 교회가 성장하여 신자 수가 불어나면, 신자 수를 적당히 나누어 새로운 지역에 ‘분립 개척’하여 새 지역에 교회를 생겨나게 하는 방식이다. 사실 목회자가 교회의 신자들을 떼어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자기 살을 떼어내는 것같은 아픔이 있다. 그럼에도 분립 개척을 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그 일을 한다. 그 이유는 개교회의 성장보다는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교회 개척>, 157~159).

 

그 외에도 성경에는 에베소교회의 모델과 로마교회의 모델이 있다. 에베소 모델은 사도 바울이 노년에 교회를 개척하고 젊은 일꾼들을 훈련시켜 주변 지역에 새로운 교회들을 개척하기 위해 일꾼들을 파견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로마 모델은 여러 다른 지역 교회에 살고 있던 신자들이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고 한 도시로 모여 이식시킨 방식이다. 상술한 것처럼 신약성경은 1세기 때 교회가 개척된 네 가지 방식을 제시해 준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두 사람이 한 팀이 되어 교회를 개척하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성경적 방식인데, 오늘날엔 그것을 찾아보기가 어렵다(<유기적 교회 세우기>, 45~46쪽).

 

이제 지역 교회의 구성에 대해 알아 보자. 흔히 신자들 가운데, 두 세 사람의 성도가 모이면 그것을 곧 교회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대개 사람의 수가 몇 명이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것이 곧 교회가 아니냐고 말한다. 그런 주장은 일반적으로 마태복음의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는 말씀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데, 교회란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며 몇 사람의 성도가 모여서 구성된다고 해서 그것 자체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말씀(마 18:20)은 앞의 문장과 관련하여, 전반적인 주제는 ‘지역 교회의 권징’에 대한 교훈이다. 앞의 문장인 17절에 “만일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고 쓰여 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교회’라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20절의 ‘두세 사람’은 믿는 사람의 단순한 수가 아니라 ‘지역 교회’에 속한 두세 사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지역 교회에 속한 어떤 성도가 죄를 범했을 경우 그것을 알게 된 교회의 다른 성도들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여기서 ‘두세 사람’은 교회의 권징을 위한 절차에 대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두세 사람’의 작은 수라도 모이면 교회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은 소수라도 교회가 구성될 수 있다는 근거가 아니라, ‘권징 사역의 절차’에 관련된 것이다(<열매맺는 신앙생활>, 이광호, 도서출판 깔뱅, 243~244). 상기 내용의 출처와 같이 장로교단의 목사인 이광호 교수는 마태복음 18장 20절 말씀의 주제를 ‘지역 교회의 권징’에 관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장로교단의 윤석준 목사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언급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는 이 말씀을 ‘기도에 대한 본문’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 본문(마 18:20)은 주로 우리에게 ‘기도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많이 사용되는데, 보통 이 말씀은 “여러분이 모여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십니다”라고 말하기 위해 주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 본문은 전혀 기도에 대한 본문이 아니다. 이 본문은 앞의 문맥과 관련하여 살펴볼 때 기도에 대한 본문이 아니라 ‘지역 교회의 권징’에 대한 내용이다(<한국교회가 잘못 알고있는 101가지 성경이야기>, 윤석준, 부흥과 개혁사, 29~30쪽).

상기처럼 윤목사도 ‘지역 교회의 권징’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 앞의 책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85문에도 “신자가 교리나 생활에서 그리스도인답지 않고, 또 자신의 오류나 악행에서 돌이키기를 거부한다면 그 사실을 교회 곧 치리회에 보고해야 하며 이에 대한 근거 구절로 마태복음 18:15~18을 인용하고 있다”고 써 놓았다(앞의 책, 36~37).

 

그리고 많은 성경 주석을 집필한 윌리암 맥도날드도 그의 저서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는 이 말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구절은 문맥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선적으로는 단순한 형태의 신약의 ‘지역 교회의 구성’을 가리키거나 일반적인 ‘기도 집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어떤 죄로 인해 분리된 두 그리스도인의 사이에서, ‘범죄자의 징계’에 관해 화해를 도모하는 모임을 가리키는 말씀이다”고 서술했다(<마태복음>, 윌리암 맥도날드, 전도출판사, 280쪽).

 

또한 노먼 크로포드와 한스 바우만도 그들의 저서에서 “마태복음 18장 17절에 나오는 교회는 ‘지역 교회’를 가리키는데, 지역 교회에서 죄를 범한 자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려 할 때는 징계가 필요하다. 이 징계를 위해서는 치리회와 같은 모임이 필요한데, 교회의 질서와 유지를 위한 치리는 교회를 다스리는 장로들의 몫이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한두 사람(18:16), 두세 사람(18:20)’은 지역 교회의 장로들이라 볼 수 있다”고 써 놓았다.

 

그리고 “당시 예수님은 이 ‘한두 사람’이 지역 교회의 장로들이라고 말씀하실 수 없었는데, 이는 당시 유대의 회당에 장로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시점에서 장로들을 언급한다면 혼란이 초래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20절의 두세 사람이 함께 모이는 모임은, 지역 교회의 치리를 위한 가장 작은 집회인 ‘장로 모임’을 의미한다”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함께 모이다’는 헬라어로 ‘쉬나고’이다. 20절의 ‘모이다’는 의미로 번역된 ‘쉬네그메노이’의 원형은 ‘쉬나고’인데 이것은 함께 모인다는, 모임 또는 집회의 의미가 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모임(집회)들은 모두 ‘쉬나고’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모임의 진리>, 노먼 크로포드, 기둥과 터, 10쪽 / <이미 있는 진리를 생각하라>, 한스 바우만, 전도출판사, 15~17, 157쪽).

지금까지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개척과 그 시작의 중요성, 그리고 교회 개척에 관한 몇 가지 모델과 지역 교회의 구성에 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성경 말씀에 관해” 여러 저자들의 견해를 살펴 보았다. 그럼 이제는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진리(교리)에 대한 ‘실행적인 측면’에 대해 알아 보자. 이에 대한 저명한 성경 교사들의 저서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대체로 ‘큰 주제들을 중심’으로 공통점을 모아 보았다. 그 큰 주제들이란,

 

첫째로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구성원에 대한 것과, 둘째로 예수님이 친히 제정하시고 명령하신 두 가지 예식인 침례와 주의 만찬에 대한 것들이다.

먼저, 지역 교회의 구성원들에 대해 알아보자. 신약성경 빌립보서 1장 1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 쓰인 것처럼 지역 교회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 즉 성도들, 감독들, 그리고 집사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지역 교회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야 하며 이것이 성경적임을 알 수 있다.

초기 교회시대에 성도들이 집회를 갖기 위해 주로 모인 장소는 가정집이었는데, 대개 일반 가정집보다는 조금 규모가 큰 가정집을 소유한 성도의 집이었다. 이러한 가정집에는 대개 40명에서 50명 정도 수용이 가능했으며, 간혹 거실이 큰 경우에는 70명 정도 모일 수 있었다(<신약성서의 교회>, 다니엘 해링턴, 대한기독교서회, 84쪽). 이처럼 가정집에서 모임을 가진 성경에 나오는 지역 교회들은 상기처럼 세 가지 부류(성도들, 감독들, 집사들)의 구성원들로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세 가지 부류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첫 번째가 성도들이다. 이 성도들은 영적으로 거듭난 구원받은 신자들을 가리킨다. 교회란 이처럼 구원받은 신자들의 모임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지 않은 가짜 신자들의 모임은 교회가 아니며, 이런 가짜 신자들은 수백 명이나 수천 명이 모여서 집회를 가져도 이런 교회는 비성경적인 가짜 교회인 것이다. 이를테면 기독교 이단들인 모르몬교회나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회나 신천지교회 등은 비성경적인 가짜 교회들이다.

 

심지어 국내 주요 교파나 교단 내에서도 구원받지 않은 가짜 신자들이 부지기수다. 생명의 말씀사 대표이며 장로교단의 목사인 김창영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하기를 “국내 교회에는 짝퉁 구원이 판을 치고 있다.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짝퉁으로 믿는 교인들이 많으며 한국교회에는 구원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구원 받음>, 김창영, 생명의 말씀사, 20~21쪽). 이처럼 국내 교회에도 구원받지 않은 신자들로 이루어진 비성경적인 가짜 교회들이 부지기수다.

더욱이 국내 주요 개신 교파와 교단 내에서는 구원도 받지 않고 목회를 하는 목사들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주요 교파의 16명 목사와 신학대 교수들이 집필한 저서에서도 언급하기를 “국내에 자신의 개인의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는 목사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은 신학교를 졸업한 뒤 마치 운전 면허증을 취득하듯이 강도사 고시, 목사 고시를 보고, 그 다음 절차에 의해 목사 안수를 받는데 안타깝게도 자신은 구원의 확신도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자들이 목회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먼저 구원의 확신부터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교회 개척>, 105쪽). 이처럼 이런 가짜 목사들이 존재하는 교회가 바로 가짜 교회인 것이다.

 

상기에 언급한 세 가지 부류 가운데 두 번째로 나오는 사람들이 감독들이다. 이 감독들은 장로들과 동일한 사람들이며, 이러한 장로들은 지역 교회에서 양 무리에게 본을 보이며 양 무리를 인도하며 감독하는 자들이다. 이들의 자격은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에 나타나 있다. 오늘날 지역 교회는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2인 이상의 복수장로체재로 인도되지 않고, 성경에 나오지 않는 인물인 일인 담임목사의 독재체제로 운영되고 있는데, 이러한 제도는 비성경적인 것이다. 그리고 세 가지 부류 가운데 세 번째로 나오는 사람들은 집사들이다. 이 집사들은 지역 교회에서 주로 재정을 맡아 관리한다든지 하는 물질적인 분야에서 섬기는 일꾼을 말한다.

 

상술한 것처럼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직분은 장로와 집사밖에 없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교회는 장로와 집사의 두 가지 직분 외에, 성경에 나오지 않는 서리집사와 권사와 권찰 직분을 도입하여 시행하고 있다. 이러한 서리집사와 권사와 권찰 직분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가짜 직분으로서, 현재 이 직분을 시행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다(<장로교회는 없다>, 황규학, 에큐메니칼연구소, 205쪽 / 열매맺는 신앙생활, 43쪽). 이 가짜 직분 제도는 돈을 좋아하는 삯꾼 목사들로 가득 찬 국내 주요 교파에서 대부분 시행되고 있으며, 단지 극소수의 양심적인 목사들만이 이 제도를 거부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비성경적인 제도는 하루빨리 폐지되고 사라져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친히 제정하시고 명령하신 두 가지 예식인 ‘침례와 주의 만찬’에 대해 알아보자.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모든 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다(마28:19~20). 따라서 지역 교회는 이 명령을 따라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모든 거듭난 자들에게 침례를 베풀어야 한다. 침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고 구원의 표로서 행하는 의식이다. 침례에 순종한 자는 지역 교회의 지체로 영접되어 다른 성도들과 교제하게 되며 주의 만찬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은사에 따라 교회를 위해 봉사하게 된다.

 

그리고 ‘주의 만찬’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친히 분부하셨고, 또한 하늘로서 재차 사도 바울에게 명령하신 기념예식이다(고전11:23). 그래서 지역 교회의 신자들은 이러한 ‘주의 만찬’ 예식에 참여함으로 그분의 고귀한 죽음에 대해 예수님께 경배를 드린다. 바로 이 경배를 드리는 것이 예배이며, 이 ‘주의 만찬’이 지역 교회의 공중 예배였다. 초기 교회시대에는 매 주일마다 ‘주의 만찬’ 예배를 행하였다. 서울신학대학교의 예배학 담당인 조기연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지역 교회는 ‘주의 만찬’을 매주 거행하는 것이 성경적이며 신학적이다”고 적어 놓았다(<묻고 답하는 예배학 Cafe>, 조기연, 대한기독교서회, 163쪽).

지금까지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실행적인 측면에 대해 몇 가지를 살펴 보았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를테면 “지역 교회의 독립성,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의 실행, 교회의 정기 집회(말씀집회·기도집회·복음집회), 교회의 재정 등등”이 있으나 지면 관계로 다 언급할 수는 없다.

 

상술했듯이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시작은 대단히 중요하다. 안디옥교회처럼 기존교회가 교회 개척의 은사를 가진 두 사람을 파송하여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교회 개척의 은사도 없는 사람들이 혼자서 단독으로 무모하게 개척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대부분 1년 안에 문을 닫고, 나머지도 미자립 상태로 버티다가 결국에는 거의 다 문을 닫는다. 그리하여 해마다 3천개의 소형 교회들이 생겨나며 문을 닫는 현상들이 반복되고 있다(<대형교회가 망해야 한국교회가 산다>, 이계선, 들소리, 135쪽). 설령 극소수의 교회가 자립하고 성장한다 하더라도 이런 교회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방식이므로 비성경적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처럼 불가피하게 ‘이식 또는 이주’에 의해 개척되는 것도 성경에 나오는 모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적지 않은 교회들은 ‘이식 또는 이주’가 아닌 교회 내부에서의 ‘주도권 싸움’ 때문에 둘로 갈라져 왔다. 이를테면 한 교회에 같이 있다가 서로 싸우고 마음에 상처를 입은 뒤 둘로 나뉜다. 그러나 이것은 분립이 아닌 분열이다(<교회 개척>, 185쪽). 이렇게 주도권 다툼으로 생겨난 교회들도 성경에 그 모본이 없으므로 성경적인 교회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역 교회의 ‘시작’은 성경에 나오는 모본을 따라 시작하는 것이 성경적일 것이다. 그리고 지역 교회의 진리와 교리적인 ‘실행’도 성경에 나오는 모본을 따라 실행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이를테면 지역 교회에는 구원받은 성도들과 성경적인 자격을 갖춘 장로들과 집사들이 있고, 또 예수님이 직접 명하신 두 가지 예식인 침례식과 주의 만찬 예식, 그리고 그 외의 여러 가지 성경적인 교리의 측면에 대해서도 올바른 실행을 하는 교회가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지역 교회의 ‘시작’에 있어서는 비성경적으로 시작된 교회가 적지 않다. 하지만 지역 교회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지역 교회의 시작에 대한 성경적인 모본에 대한 지식과 또 지역 교회의 진리와 교리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갖고 있고, 또 비성경적인 부분들이 있다면 그때마다 과감히 고치고 개혁해 나간다면 이런 지역 교회들도 성경적인 지역 교회라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지난 날의 잘못된 시작에 대해 인지하고 성찰하면서, 현재는 자신이 속해 있는 지역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의 진리(교리)에 대해 어긋나지 않고 올바르게 실행하고 있다면, 이러한 교회는 성경적인 지역 교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입력 : 2011년 12월 14일 (수) 15:08:52 / 최종편집 : 2011년 12월 14일 (수) 15:16:23 [조회수 : 88] 권영문kymn@ks.ac.kr

권영문/전 경성대 교직원, 현 기독교 칼럼니스트·<성경적 기독교와 엉터리 기독교>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