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교회영성묵상

페르페투아와 펠리키타스의 순교 사건

공격이 2011. 2. 14. 15:33

 

□페르페투아와 펠리키타스의 순교사건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스데반의 순교이후 예루살렘에 큰 피박이 있어 사도외 많은 기독교인들이 다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습니다.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한 가지 특이한 순교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페르페투아와 펠리키타스 등 5명의 순교였습니다. 이들 5명의 순교자들은 카테쿠멘들, 곧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학습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체포된 것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황제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상류층의 귀부인으로 임신 중 체포되었습니다. 펠리키타스등 4사람은 페르페투아의 노예들이었습니다. 이 4명의 노예는 펠리키타스를 비롯하여 레보카투스, 사투르니누스, 세쿤두르스였습니다. 그 이름들이 보여 주듯이 펠리키타스외의 3사람은 남자노예였습니다.

 

귀부인이었던 페르페투아가 체포되자, 그녀의 아버지는 신앙을 포기하고 생명을 구하도록 애걸하며 종용하였습니다. 당시 페르페투아는 겨우 21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페르페투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물이 다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을 새로이 바꿀 수 없듯이, 나도 기독교 신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 이름을 바꿀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들의 신앙을 포기하도록 하는 노력이 다방면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재판은 지연되고 길어졌습니다.

 

 

 

페르페투아는 체포된 후 8일 만에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그가 출산의 고통으로 비명을 지를 때 간수들은 “그렇게 아파하면서 어떻게 당신이 원형경기장에서 짐승들에 의해 죽을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그녀의 답변은 순교에 대한 당시 신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나의 고통은 나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맹수들이 달려들때 나 아닌 다른 이가 내안에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내가 그를 위해 고난을 당하니 그가 내대신 고통을 받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페르페투아의 갓난아이는 곧 다른 여신도에 의해 입양되었습니다.

 

이제 순교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먼저 남자 3명, 곧 레보카투스, 사투르누스, 세툰두르스가 원형경기장으로 끌려나왔습니다. 일주일간 굶겨두었던 맹수를 풀어주자 맹수들은 묶여 있는 그들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곧 3사람은 피에 주린 군중들의 환호소리를 뒤로 한 채 용감하게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곧이어 페르페투아가 그의 노예인 페리카타스의 손을 잡고 원형경기장에 나타났습니다. 경기장을 꽉 매운 군중들은 놀라기 시작했습니다. 귀부인이자 자유인이 예수를 믿었다는 사실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침착함과 예모를 흩트리지 않은 것 때문에 놀란 것도 아니었습니다. 군중들이 놀란 것은 자유인인 페르페투아가 노예인 펠리키타스의 손을 잡고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손을 잡았다는 것은 “동료”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적 관습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유인이 노예와 한상에서 음식을 먹거나 같은 자리에 동석하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노예는 손을 잡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페르페투아는 수많은

이교도들 앞에서 견딜 수 없는 한계를 뛰어넘는 신앙의 용기와 더불어 사회적 신분을 뛰어넘는 신앙의 위대성을 공개적으로 시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침묵은 웅변이었습니다. 그녀는 말없이 신앙의 힘을 보여 주었습니다.

 

곧 이어 페르테투아와 펠리키타스는 달려드는 들소에 의해 받혀 몸이 찢겨가기 시작했습니다. 찢겨진 몸으로 페르페투아는 자신의 머리를 묶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머리가 풀어진 것은 슬픔과 애도의 상징인데 이날은 그녀의 가장 축복된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여인은 경기장 한 가운데서 피를 흘리면 죽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두 여인은 마지막 작별의 눈인사를 나눈 후 다시 칼에 찔려 죽어갔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사회적 신분의 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때가 202년 3월 7일이었습니다. 이 참혹한 사건이 있은 후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박해가 중단되었습니다. 계속..........

 

 

출처“이상규교수의 교양으로 읽는 역사. 이상규[고신대교수]. SFC. pp38-43.에서 편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