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교회영성묵상

[스크랩] 제2장 보충자료(기독교 강요의 칼빈주의 신학사상)

공격이 2008. 3. 21. 18:53

「기독교 강요」의 분석을 통한 칼빈주의 신학 사상에 대한 소고

부신복음신학교

교수 고 학 곤

들어가는말

칼빈은 일반적으로 그의 주 저서인 「기독교강요」를 통해 종교개혁의 기초를 제공한 한 사람이며 장로교의 교리를 제정한 저술가와 신학자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의 여정을 살펴보면 철저한 인문주의자로서 성경적 신앙을 그의 삶 속에 실천한 목회자이며 종교개혁자임을 알게 된다. 동시에 그는 파렐과 함께 제네바에서 추방을 당하면서까지 종교와 사회의 개혁을 단행할 때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과 설교를 통해 성경적인 바른 사회를 실현하는 데 온힘을 다했다고 여겨 진다.

이러한 현대 신학의 체계를 세우며 지금까지 개혁신앙의 뿌리가 되는 칼빈의 신학사상을 집대성한 기독교강요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 할 수 있다.

본 논고에서는 그의 생애와 사상을 간략하게 살펴 본 후 기독교강요와 그 배경과 목적, 그리고 신학 사상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I. 칼빈의 생애와 사상

칼빈은 1509년 프랑스의 노용(Noyon)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 이름은 쟝 깔뱅(Jean Calvin) 혹은 쟝 꼬뱅(Jean Cauvin)이라 불리었다. 노용시의 주교의 자녀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1521-23년 경 파리 유학을 같이 갔을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라 마르슈대학에서 라틴문법과 교양과정을 이수한 후 파리의 몽떼귀(de Montaigu) 대학에서 신학예비과목을 오를레앙(orleans)대학에서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가 파리 대학교에서 보수적인 신학만을 공부했었다면 로마 카톨릭교회의 한 성직자로서 남아 있었을 것이나 오를레앙 대학에서 인문주의를 접함으로써 로마 카톨릭교회를 비판하고 종교개혁 운동을 전개할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보여 진다.

153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프랑소아 I세가 1530년에 설립한 프랑스 대학(Coll ge de France)에서 희랍어와 히브리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1532년 「세네카 관용론 주석」(Commentary on Senecas Treatise De Clementia)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은 당시 베스트셀러인 마키아벨리(Machiavelli)의 군주론(IL Principe)에 나타난 절대 군주의 사상을 공격한 복음주의적인 정치 윤리학의 저술이다. 이점에 있어서 그는 신학자이었을 뿐 아니라 교회의 정치가요 외교가 이었다. 이때를 전후로 하여 그에게는 점진적인 회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이 책에서 성서적 가르침과 고전철학 전통을 동심원적 관계로 묘사함으로써 복음주의를 강조하면서도 인문주의를 부정하지 않는 이 둘을 종합하는 작업을 하였다.

즉 칼빈 신학의 주제는 첫째,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구속활동을 하심과 동시에 교회 밖에서 창조활동을 하신다는 것이다. 둘째, 영원한 성자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안에 계심과 동시에 육체 밖에서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셋째, 성령은 특별 은총을 통해 신자들을 성화 시키시며 동시에 일반은총을 통해 세상에 지혜를 주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칼빈에게는 복음주의와 인문주의가 함께 존재하였다.

1533년 파리대학교의 콥 총장의 취임연설을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 종교개혁자 루터의 말을 인용하여 개혁적인 내용을 담아 써준 것에 연루되어 파리를 피신해야 했으며 1534년에는 성직록을 반환하였다.

1534년 마르쿠트(Antonie Marcourt)가 미사를 반대하는 조문들을 붙인 사건이 있은 후 프랑소아 I세가 개신교도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자 칼빈은 서둘러 복음주의의 진리를 설명하기위해 프란시스 I세에게 헌정하는 글을 첨부하여 1536년 바젤에서 라틴어로 출판한 책이 된 「기독교강요」(Institutio religionis christianae) 제1판이다. 이 책의 본문은 조직이 단순하며 분량도 많지 않았다. 율법, 신앙, 기도, 참된 예전과 거짓 예전, 기독교의 자유 등이었다.

칼빈은 하나님과 자신을 아는 것이 최고의 지식이라고 가르쳤다. 정확한 지식은 성경에서만 주어지는 데 성경을 읽는 신자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증거는 하나님의 음성으로서 보증된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인생의 처음 가는 목표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선과 선행의 능력을 상실한 인간은 완전한 선행을 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공로가 될 수 없다. 전 인류는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죄 값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는 데 이일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자유스러운 성령의 역사이다. 칼빈의 "행위로서는 아니지만 행위 없는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았다"(We are justified not without, and yet not by works)는 말은 칼빈의 독특한 표현으로서 신자로 하여금 삼속에서 하나님 뜻을 성취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여행후 제네바에 들렸을 때 그곳에서 종교개혁을 하던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을 만나게 되었다. 파렐은 「기독교강요」의 저자인 칼빈이 제네바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칼빈을 찾아가 함께 개혁에 동참할 것을 권유 하였으나 그는 간청으로서는 목적을 달성 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저주하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명하노니, 너는 너의 학문으로 핑계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만일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거절한다면 하나님이 너를 저주하실 것이니, 이는 네가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고 오직 너 자신만을 위해서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성서 강해자와 설교자로 일을 하게 되었다. 파렐과 함께 베른(Bern)이나 보드(Vaud) 그리고 로잔(Lausanne)에까지 종교개혁을 확립하도록 하였다. 이들의 개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찬식을 매달 행하며 감독자들은 성찬에 합당치 않은 자들을 찾아내어 출교를 시킨다. 둘째, 교리문답을 만들어 아동교육을 시킨다. 셋째, 신조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부과한다는 것이었다. 제네바의 소의회는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수정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1538년 200인 의회에서 거센 반대에 직면하여 그해 4월 칼빈을 비롯한 제네바 목사들은 제네바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마티 부처(Martin Bucer, 1491-1551)의 초청으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목회를 하였으며 1949년 「기독교강요」의 증보판과 「로마서 주석」을 출판하였다. 1541년 제네바와 베른과의 조약체결에 관한 내부 갈등이 생겨 다시 제네바에 오게 되었다.

칼빈은 제네바에 오자 「교회법령」을 작성하였다. 교회의 네 직임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이며 장로는 소의회에서 12명을 선출하도록 하였으며 이들은 목사와 함께 당회(Consistoire)를 구성하였다. 당회에서는 권징의 문제를 취급하였으며 권고해도 회개하지 않으면 출교하고 죄가 무거우면 시 당국에 넘겨 처벌을 하였다. 칼빈은 제네바가 기독교 공동체의 모델이 되기를 원했다. 제네바에는 많은 프랑스의 난민들이 몰려왔으며 그 이외에도 이탈리아, 네델란드, 영국, 스코틀랜드에서도 왔다.

칼빈의 개혁활동은 다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개혁의 엄격성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과 외부인들의 영향력에 두려움을 갖던 본토인들의 도전이었다. 칼빈 신학에 대한 비판은 볼섹(Jerome Bolsec)에 의해 되었는데 "칼빈의 예정설은 하나님을 죄의 원인으로 만든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1553년 칼빈의 반대파들이 선거에서 우세하였으나 "삼위일체론과 유아세례를 비판하는" 세르베투스 사건이 터져 그가 화형 당함으로써 자유주의자들의 기가 꺾이게 되었다.

1554년 선거에서 칼빈파가 우세하여 네 명의 집정관이 모두 칼빈파가 되었다. 이후부터 칼빈의 개혁운동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제네바를 방문한 죤 낙스의 표현은 이를 반증해 준다. "여기에 사도 시대 이후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가 있다. 나는 이곳보다 도덕과 신앙이 향상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제네바의 정치는 안정되었으나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그는 여러 가지 질병을 겪으면서 구술하여 저작활동을 하였다. 1564년 5월 27일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저작들과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은 유학생들을 통해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2. 기독교 강요의 역사와 구조

《기독교 강요》초판은 1536년 3월에 바젤의 한 출판사(Thomas Platter and Balthasar Lasius)에 의해 출판됐다. 이것은 적은 포켓형 단권 516페이지의 것이었는데 1장 율법(십계명), 2장 신조(사도신경), 3장 주기도, 4장 성례(세례와 성찬)는 루터의 교리문답의 순서대로 됐고, 5장 거짓된 성례, 6장 기독자의 자유, 총 6장으로 되어 있다.

1-4장은 교리문답을 내용으로 한 교훈적인 것이며, 5,6장은 변증적이다. 5장에는 고해성사, 성직 임직식(신품성사), 도유식(종부성사), 견신례, 결혼식의 성례성(혼인성사)을 논박했고, 6장에는 기독자의 자유뿐만 아니고 복음적 사회 안에서의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를 논하였다.

당시 종교개혁 2세대로서 칼빈이 처한 역사적 환경은 개혁교회가 확실히 카톨릭과의 분리된 시점과 급진적 종교개혁자들의 혼란 속에서 성경적 교회관과 바른 교회 형성, 양육과 조직 훈련이 필요했으며, 개혁신학의 총정리 및 기초 확립이 필요했으며 개혁 1세대에 의한 20년간의 많은 토론의 내용을 정리할 필요성도 있었던 것으로 인식된다.

이것은 1534년에 있었던 프랑스 왕이 종교개혁에 반대한 태도에 항거하는 답변이기도 했다.

카톨릭과 완전히 갈라지는 사건으로 벽보사건(1534)이 있었다. 이는 프랑스에서 목회자 ‘앙뚜완 마르꾸르’에 의해서 카톨릭의 미사를 반대(우상숭배)하는 포스터가 파리 시내와 프란시스 1세 침실에 까지 나붙자 프로테스탄트는 강제로 추방되고, 1535년에는 지도자들이 화형 집행 사건이었다.

당시 카톨릭 교회의 지도자들은 개신교도들에 대하여 "로마 카톨릭의 법적제도인 교회조직에 대항하여 교회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사람들로서, 모든 제도와 정부를 전복하며 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해치고 모든 법률을 폐기하고 권력과 재산을 분쇄하는 행동을 한다"라고 지적하면서 개신교도들을 "투옥, 추방, 재산 몰수 및 화형 등으로 처분해야 하며 육지와 바다에서 말살 시켜야 한다"고 외쳐댔다.

이것은 개신교에 대한 매우 잘못된 오해이며, 이러한 오해와 비방에 대해 프란시스 I세 왕이 직접 나서 변증해 줄 것을 칼빈은 간곡히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칼빈의 현실적인 시민 정부관을 보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는 세속의 통치권이 결코 신앙과 별개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나라를 통치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면 그 왕은 왕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고 폭력적 행위를 하는 것이다"라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교회와 국가의 밀접한 관계를 지적하고 있다.

국가는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임무에 더하여 올바른 교리와 예배가 유지되도록 노력해야 하며, 또한 계명을 범하는 모든 죄를 형벌하는 일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국가는 그 법률을 하나님의 율법에 준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칼빈은 적어도 복음에 일치하는 한 자기 신하들의 신앙을 존중하는 것이 왕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국왕은 국민들이 복음에 순종하고 있는 한 국민들의 신앙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초판은 나온 지 일 년 내에 매진되고 말았다. 이것은 라틴어로 된 것이기 때문에 독자층이 제한된 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원했다.

제2판 역시 라틴어로 1539년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출판됐다. 이것은 소책자를 벗어나 기워 메운 책(in-folio)으로 되고 초판보다는 3배나 되는 중보 판이었고 11장을 보충했었다. 처음 2장을 새로 쓰는데 초판에서는 제1장 율법 안에 요약했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神知識)과 사람의 지식, 구약과 신약의 관계, 유아세례 변호, 성경의 가치, 성화, 천년 왕국 반대론을 1,2장에 따로 기록했다. 초판의 제2장은 또 회개, 신앙, 칭의, 예정과 섭리(추가됨)가 각 장으로 나누어 썼다.

이 제2판은 1541년에 프랑스로 번역 출판되었는데, 라틴어를 해독하지 못하는 프랑스의 종교개혁자들을 위해서 유익한 것이었다. 그런데 1542년 7월 1일 프랑스 의회는 《기독교 강요》라틴어판과 프랑스의 번역판을 다 이단서로 지적하고 발매금지 등 탄압을 선포했다.

이 프랑스어 판은 개혁교회의 교리적 기초 입문서, 교회들이 칼빈주의자가 된 것은 프랑스어 번역의 덕분임, 루터의 독일어 성경과 같이 광범위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제3판도 라틴어로 1543년에 출판되었고 프랑스 번역은 1545년에 출판됐다. 제2판보다 4장이 증보(增補)되어 합 21장이 됐다. 증보된 장들의 내용은 맹세, 인간의 전망, 교회 권한, 교회 조직에 관한 것이다.

제4판 라틴어 판은 1550년에, 프랑스 번역판은 1551년에 각각 출판되었다. 모든 장들은 각각 구절들로 나누어져서 읽기 쉽게 되었다. 성경과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증보되고 성자숭배, 성상 숭배에 관한 것을 논박(論駁)하고 인간 양심을 해설한 것이 증보됐다. 이 4판은 여러 판을 거듭하면서 보총되어 출판됐다.

제5판 라틴어판은 1559년에, 프랑스 번역판은 1560년에 출판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필생(筆生)의 결정판이 된 것이다. 그는 그의 신체상 최악의 조건을 무릅쓰고 이 일을 완성한 것이다. 번역판도 그 자신이 손수 완필한 것이다. 이 결정판은 제4권, 전 80장이다.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편찬한 것으로 초판보다는 요리문답식에서 과감히 탈피한 완전한 새 책이 되었으며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왕 프랜시스 I세에게 드리는 헌사

1) 기독교강요가 쓰여 진 배경

① 프랑스 민족의 독실한 신앙에 도움을 주려 함.

② 그릇된 소문으로 인한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박해의 지적.

③ 왕의 공정한 조사 요구

2) 핍박 받는 복음주의 자를 위한 탄원

① 복음 주의자: 가) 성서적 신앙 나) 영웅적 순교

② 가톨릭 성직자들: 가) 성서적 신앙 경시 나) 미사, 연옥, 순례와 같은 하찮은 일 강조

3) 복음주의적 교리에 반대하는 적대자들의 주장

① 복음주의적 교리를 새것, 갓 태어난 것, 의심스럽고 불확실 한 것이라고 함

② 참된 교리가 인간의 불경과 잘못으로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③ 우리의 확신은 죽음의 공포와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④ 기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야 한다.

4) 교부들이 개혁 교훈을 반대한다는 부당한 주장

① 가톨릭 성직자들은 교부들의 미덕 보다 단점이나 실수를 숭배 한다.

② 성경의 증거 없는 제도, 교회법, 교리적 결정은 경솔한 짓이다.

가) 하나님은 금이나 은을 필요로 하시지 않음: 풍성한 의식.

나) 고기를 먹는 것과 금함: 사순절 금식.

다) 수도사들도 일을 해야 함: 게으름과 음란.

라) 그리스도나 성자들의 성상의 문제

마) 죽은 자의 안식: 죽은 자의 영원한 고독.

바) 빵과 포도주의 성찬예식 사용: 화체설.

마) 모든 신자들의 주님의 만찬(Lords Supper)에의 초대: 공적 미사와 사적 미사.

바) 성서적 근거: 법령과 법칙의 범람.

사) 성직자 결혼: 독신 생활.

아) 하나님의 말씀: 사색적인 신학 논쟁.

제 1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The Knowledge of God the Creator)

1) 하나님: 1-4장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 5장 거짓된 철학적 지식

2) 계시: 6-9장 성경의 계시와 성경 이외의 그릇된 계시

3)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 10-12장 미신, 우상

4) 하나님: 13장 삼위일체에 관한 참된, 그릇된 견해(세르베투스)

5) 창조: 14장 천사와 사탄, 옳고 그릇된 견해

6) 인간의 지식: 15장-16장 영혼과 육체, 인간에 대한 진실 된 성경의 견해와 그릇 된 철학적 견해.

7) 섭리: 16장 진실 된 견해와 그릇된 견해 17장 교리의 적용 18장 불경한 자들의 심판과 하나님의 역사.

제 2권: 그리스도안에 계신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The Knowledge of God the Redeemer in Christ)

1) 인간의 타락과 원죄 2)율법과 복음 3) 중보자 그리스도 4) 선지자, 왕, 제사장 으로서의 그리스도 5)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

제 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The Way in which We receive the Grace of Christ) 1) 성령의 역사 2) 믿음 3) 회개 4) 기독교인의 삶 5) 믿음에 의한 칭의 6) 기독교 인의 자유 7) 기도 8) 예정설 9) 최후의 부활

제 4권: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초대하시는 하나님(God invites us into the Society of Christ) 1) 교회의 본질과 조직: 진정한 교회는 경건한 자의 어머니이다 2) 교회의 회의와 권위 3) 교황의 제도 4) 성례와 세례 5) 성만찬 6) 국가통치

이 1559-1560년의 결정판은 영원히 기념 판으로 남는다. 칼빈은 방대한 자료를 너무 잘 체계화 시켰고, 객관성을 유지하였다.

칼빈주의 전체는 기독교 강요에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을 일생 동안 개정, 수정, 보완하여 풍부하게 하고, 칼빈은 가장 중요하게 여긴 저술이다. 기독교 강요는 기독교 교리의 완전 해설서, 칼빈주의 사상의 종합 판을 보여주며 기독교 강요의 중요성이 다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 성경해석적 측면에서 성경해석의 길잡이, 성경의 중심 내용 제시, 성경의 연구 자세, 성경해석의 안경, 안내자, 지름길이다.

(2) 교회사적 측면에서 중요 - 종교개혁 이전의 신학을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총정리, 1600년의 성경해석의 전통이 남아 있음, 교부신학, 중세신학, 개혁신학의 액기스, 개신교, 개혁주의 신학, 장로교의 역사, 신학의 발전을 이룩했다.

(3) 현실 목회적 차원의 중요성 - 목회자와 성도의 신앙적, 신학적 자기 점검, 영적, 지적 점검, 성경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하는가?, 현재나의 수준 점검, 한국교회 수준 점검, 신앙과 삶의 교과서이다.

칼빈은 1541년 프랑스판 서문에서 이 책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다가가는 열쇠와 입구가 되어 거룩한 말씀을 진실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개혁주의 교회의 신학대전(Theologica Summa)이다. 칼빈 생전에도 거대한 작품이었지만 그의 죽은 후에도 조금도 변함이 없다. 이것은 칼빈주의 정통주의의 급진적 성장을 큰 원인의 하나였으며, 후에도 유일한 신학적 고전인 것이다. 심지어 반대론자들도 그것을 결코 수정하지 못했다.

 

3. 기독교 강요의 자료

칼빈은 루터, 쯔빙글리, 멜랑히톤, 부처보다는 한 세대 젊은 사람이었으므로, 이런 선배들의 저서나 행위의 영향 없이 신학체계를 세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칼빈 자신은 상상적인 것보다 조직적이고, 새로운 발견보다는 인문적 지식을 넓히는 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칼빈은 개인 자신의 능력과 독창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배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지하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상을 새롭게 체계화시키고 배열하는데 중점, 선배들의 저서와 업적을 참조하지 않고서는 업적을 이룩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칼빈이 루터의 가장 신실한 제자였다고 하며, 더러는 루터 사상의 배교(背敎)자로 보며, 또 어떤 이들은 칼빈은 그의 사상이 전적으로, 아니면 부분적으로 어거스틴과 부처에서 받았다고들 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저서들을 통해서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을 요약할 수 있다.

 

철저한 성경연구

칼빈은 성경전체를 면밀히 연구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특히 다른 어떤 종교개혁자들보다 구약 지식에 특출했다. 그는 자신의 신학의 기초를 성경에 두었고 그의 모든 저서는 주석에 그 중요성을 가졌다. 그의 신학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신학적 의의의 근원이나 종교적 심성에 대한 통찰(洞察)을 그는 끈기 있게 성경연구, 특히 선지자들과 사도 바울의 연구에서 얻어낸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가 성경연구나 해석에 있어서 과학자들처럼 한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과 루터의 신앙과 신학적 노선에서 교리적, 성경적 입장의 확립을 이룩한 것이다.

 

면밀한 교부 연구

교부들의 많은 저서들에 면밀한 관심을 가졌다. 그의《클레멘트 주석: 관용론》(Commentary on De Clementia)은 아우구스티누스의《신국》에서 사상이 전수(傳受)된 것을 볼 수 있으며, 칼빈의 개종 이후 저서들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고대 헬라, 라틴 교부들에 대한 그의 관심이 더욱 깊어 갔던 것을 보여 주고 있다.

1536년 판《기독교 강요》에 사람의 영혼의 기능을 말할 때도 크리소스톰, 오리겐, 어거스틴에서 인용함과 동시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에게서도 광범위 하게 인용하였다. 이런 인용의 수집, 그 풍부성과 정밀성은 다른 종교 개혁자들의 저서들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고 더욱이 칼빈의 인용들은 허식(虛飾)이 없이 아주 적절하게 본문에 삽입되어 있다. 무리하지 않게 자유로운 배열로 인용되어 있다.

그러나 교리의 많은 부분이 일치 한다고 해서 교부들의 전통적 개념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며, 교부들이 성경의 정도에 벗어나는 것처럼 생각되면 그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입장을 취함, 성경에 명백한 의미를 간과하고 있는 부분은 비난과 그들의 주석을 거부했다.

 

어거스틴의 영향

크리소스톰에 대한 관심도 많이 있었으나 칼빈에게 특별히 큰 영향을 준 이는 어거스틴이다. 칼빈은 그의 저서들을 계속 읽었고 공감하였으며 자주 인용하였다. 때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사용한 풍유와 결말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으나 그대로 성경의 충실한 해석자로 생각했다.

칼빈이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교리들은 자유의지, 성례, 은혜, 예정에 관한 것이다. 이런 몇 가지 교리에 동의했다고 해서 교부적 권위에 대한 전통적 관념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오직 성경이 규범적 가치를 가졌으며 교부들이 이것을 가질 수는 없다고 하였다.

 

종교회의에 대한 긍정

칼빈은 종종 교부들의 자유의지론과 철학자들에 대한 연약한 태도를 공격하고 저들이 성경 본문의 명확한 뜻을 등한(等閒)히 한 주석을 거부하였다. 종교 회의에 관해서도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교회 공의회의 결정은 그때 그때의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검토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 결정들도 정확무오(正確無誤)한 유일한 성경적 표준에서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칼빈은 “우리는 고대 종교 회의-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켈베톤 회의 등이 잘못된 과오와 이단적 견해를 정죄하기 위해서 개최되었던 것을 찬양하고, 영예와 존경을 표시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 회의들에서 결정된 조문들에 관하여 하는 말이다. 이 종교 회의들은 성경의 순수하고 본질적인 해석 외에 다른 것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고대 종교 회의들이 결정한 신학적 내용을 정열적으로 옹호(擁護)하는 자가 되었다. 그의 전통적 삼위일체 신론과 기독론, 특히 세르베투스, 겐틸리스, 소시누스와의 변론에 있어서 그가 취한 태도를 보면 그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인문주의자들의 영향

칼빈 시대에 주류를 이루는 사상은 인문주의(humanism)이다. 당대의 사람들은 인문주의를 통해서 고전사상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전개되는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인문주의자로서 칼빈의 대표적인 작품은 세네카의 「관용론」주석과 「기독교강요」이다. 그의 인문주의적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처했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해야 하며 동시에 그에게서 고전문헌에 심취한 인문주의적 태도를 볼 수 있다.

칼빈이 이 작품들을 저술할 때는 당시 프랑스의 국왕 프란시스 1세(1515-1547)가 집권하며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던 시기이었다. 칼빈이 세네카의 사상을 선택한 것은 스토아 사상이 기독교사상과 마찬가지로 신의 섭리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세네카의 관용론에서 칼빈은 폭군을 국민의 뜻에 부합하지 못하는 자, 무절제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자로 규정하면서 의로운 통치자와 구별하는 것을 보게 된다.

칼빈 정치 사상의 또 다른 배경은 「기독교강요」의 서문과 그의 신학 사상에 잘 나타나있다.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서한을 통해 개신교의 신앙고백을 교리의 형태를 가지고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기독교 변증론으로서 이단자들과 난동자들로 오해를 받고있던 프랑스에 거주하는 개신교도들을 변호하고 있다. 이 서문이 갖는 의미는 어떠한 위험과 고난을 각오하면서 까지 라도 왕을 설득하여 개신교를 이해 시키려했던 면이 나타난 것이다.

정치사상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그의 신학 사상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이것을 잘 나타내주는 성구로서는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렘 9:24)를 든다. 그의 정치적 권위와 근거는 다른 여타의 철학이나 국가, 사회, 국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가 되시는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정치사상은 인문주의적 성격을 가지면서도 신학적임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칼빈은 인문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의 개종(改宗) 후에도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그의 주석이 발라(Valla)와 에라스무스(Erasmus)의 방법(논증법)에 계속 기초하고 있는 점이다. 신학적 개념에도 에라스무스의 개념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죽음을 바라는 것, 지상적 의무에 관한 것, 심지어 신앙관, 종말론에 관한 많은 구절들이 에라스무스와 평행한 유사점을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칼빈은 어디까지나 성경에 더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루터의 영향

칼빈에게 영향을 준루터의 신학사상은 다음과 같다.

(1) 신앙의 최종 권위는 로마교 회의 전통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성경"(sola scirptura)에 있다.

(2)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사람의 선행이나 로마 교회의 사제가 성레전(聖禮典)을 통해 나누어주는 공덕(功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를 전적으로 받다 들이는 "오직 믿음" (sola fides) 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義)이다.

(3) 구원은 그러한 믿음을 통해 누리는 "오직 은혜"(sola gratia) 로 주신 선물임을 강조했다.

(4) 또한 신자들은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직접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는 만인 사제직(萬人司祭職)을 주창했다.

(5) 연옥 교리와 함께 그것을 뒷받침하는 영혼 불멸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루터의 개혁은 개신교 신앙의 기초를 놓으며 칼빈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독일로부터 주로 북 유럽과 동유럽 , 영국과 러시아에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이와 같은 신학사상의 영향을 받은 칼빈은 누구보다도 루터를 극히 칭찬했다. 그리고 그의 저서들을 일찍이 거의 다 읽었다. 독일어를 해독하지 못했던 칼빈은 라틴어 원서나 라틴어 번역으로 만족했다. 칼빈의 저서에 루터의 문자적 인용은 없으나 루터의 영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점은 칼빈의 저서를 살펴본 사람은 다 인정하는 것이며 칼빈 당시의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1554년에 베론의 할러(Haller)는 칼빈이 너무나도 루터를 추종(追從)한다고 책망한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1536년의《기독교 강요》는 루터의《소요리 문답》의 내용 순서를 따라서 계획되었다는 말이 있을 만큼 루터의 영향이 큰 것이다. 뿐만 아니고 근본적으로《기독교 강요》가 루터의 사상을 힘입고 있다. 특히 십계명 강해와 신조의 제1조 강해는 그렇다. 신앙에 관해서도 루터를 따라서 정의하여 단순히 신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완전히 믿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라고 하였다.

칼빈이 독일의 종교 개혁자 루터에 의존한《기독교 강요》초판을 보면 루터파가 거의 된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고 랑그(Lang)는 말한다. 그 후에도 칼빈은 모든 기본적 교리에서는 루터와 일치했다. 즉 칭의, 죄인의 전적부패, 원죄와 실범죄, 유일의 구주시며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성령을 통한 구원의 감사, 말씀과 성례 등에 대한 교리들은 다 일치한다.

루터의 이신득의(以信得義)로 인한 중생의 중심적 교리는 신실하게 보존되고 다른 종교 개혁자들 보다 칼빈이 더 강하게 주장하며 표현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칼빈은 루터와 신학적으로 상통했던 것인데 1536년 이후부터 성찬 문제에 대해서 루터와 의견이 갈라졌다. 그것이 더 커져서 성경의 정경문제, 예정 문제, 교회론, 기독론, 성경론에 까지 번져가게 되었다. 이런 교리 문제들보다 더 크게 그들은 나누어 놓은 것은 그들의 초기 교육과 종교적 심성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루터는 5세에 라틴학교에 들어가 문법, 수사학, 논리학을 마치고, 14세에(1497) 수도원의 신앙생활했으며,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교에서 인문학과 법률학 공부하였고, 1507년 사제, 1508년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신학공부, 1511년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수 임명, 1517년 면죄부 사건으로 95개조 항 발표하는 등 초기 교육과 종교적 영향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루터의 개인주의적인 것과 신비적 경험과 칼빈의 지성주의 경향의 종교 간에 있었던 차이, 혹은 독일적 정신과 라틴 정신의 차이, 또는 루터의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과 칼빈의 하나님 중심 신학 입장의 차이 등이 있겠으나, 또 그리스도와 신자의 관계에 대한 개념 차이도 있었던 것 같다.

 

멜랑히톤의 영향

1536년부터 친구의 교제를 나누었던 멜랑히톤(Phillipp Melanchton, 1497-1560)은 독일의 인문주의자로 루터의 제자이며 프랑크프르트에서 열린 신학토론회에서 만남, 적지 않은 신학적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우의 지속했다. 그의《신학통론》(Loci Communes)을 통해서 칼빈의 사상에 자료 하나를 준 것 같다. 이 사실은 1546년의《기독교 강요》프랑스 번역판 서문에 칼빈 자신이 밝히고 있다. 멜랑히톤이 쓴《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Augusburg Congession)에 칼빈은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했고, 그것은 멜랑히톤 신학의 요약이라고 하면서 저자의 모든 해석에 동의한다고 했다. 그러나 중요한 두 가지 점에 멜랑히톤과 의견 대립된 것을 지적했는데 그것은 자유 의지와 예정에 관한 것이다(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멜랑히톤과 루터를 동지로 생각).

 

쯔빙글리의 영향

쯔빙글리(1484-1531)는 독일에서 루터가 개혁을 시도하는 동안 스위스에서는 독일보다 더 철저한 개혁이 별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경건한 로마 카톨릭의 사제요 학자며 애국자였던 쯔빙글리는 성경을 연구한 결과로 얻은 확신에 따라, 로마 카톨릭의 이교 적인 예배의식과 면죄부 제도를 전면 부정하고, 극도에 달한 성직자들의 도덕적 퇴폐를 공박하는 대담한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화체설을 반대하고, 성만찬의 빵과 포도즙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념이라고 가르침으로써 루터의 성체공존설을 진일보 시켰다. 칼빈은 성찬문재와 신학적 입장에서 더 반감을 가졌다.

이 쯔빙글리(Zwingli)와는 루터의 저서를 읽음으로부터 의견이 나뉘어 졌는데 오히려 멜랑히톤보다 거리가 멀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쯔빙글리의《참 종교와 거짓 종교》(De vera et false religione)에 대해서는 1536년《기독교 강요》를 쓰기 전에 벌써 알고 있었고 그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칼빈은 쯔빙글리를 최고의 신학자로 보지는 않았다(2류 신학자로 간주).

 

부처의 영향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인 부처를 처음 만난 것은 1537년 베른에서 열린 종교 대회에서 이며, 칼빈은 처음으로 독일의 종교 개혁과 스위스의 종교개혁에 관하여 부처와 의견을 나누었고, 그는 루터는 아직도 로마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이끌어 줄 것을 당부, 1538년에서 1541년까지 부처파로 불릴 만큼 우정이 깊었다

이 부처(Martin Bucer, 1491-1551)의 영향도 없지 않다. 1539-1541년판에 예정교리를 썼는데, 선택 또는 유기는 하나님의 예정에 각자가 의존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심 때문이라고 했다. 칼빈은 이것을 부처의《로마서 주석》에 나타난 점을 채용한 것이라고 한다(롬8:30). 칼빈은 부처가 받아들인 어거스틴의 사상을 재생시킬 뿐만 아니라 칼빈 자신의 특색 있는 필치(筆致)를 더하여 서술한 것이다.

칼빈은 예정과 예지를 분리시키고 양자 간에 어떤 원인적 관계를 개재시키지 않는데 부처는 그 반대로 예정과 예지를 혼돈 시키고 있다. 그리고 부처는 유기를 뒤에 감추고 칼빈은 선택과 유기를 서로 균형 있게 말한다.

1539년판에 기독교 강요를 보면 율법의 영구적 효과 문제와 신구약을 신의(神意)의 표현으로 보는 본질적 문제에 있어서 부처의 견해를 인용했다. 칼빈이 생각하기 수 년 전에 부처가 구약과 신약의 성례를 벌써 동일 시 했던 것이다. 그리고 회개에 관해서와 신자 생활에 관해서도 부처와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교회론에 있어서도 벌써 1530년의 부처의 주석에서 같은 것을 볼 수 있는데 보이는 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로 부처가 말한 것은 어거스틴으로 부터 받은 것인데 칼빈도 그것을 인정하나 보이는 교회에 칼빈은 강조를 둔다.

칼빈은 교회 조직은 성령의 다스리심으로 인간 생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신적 권위에 속한다는 것을 부처가 미리 선언한 대로 채용하였고, 권징 문제에 관하여도 부처를 따르면서 칼빈은 권징을 영혼의 치료에 포함시켰다.

이와 같이 칼빈의《기독교 강요》를 저술함에 있어서 그가 첫째로 성경적 기초 위에 확립하면서도 얼마나 다양하고, 폭넓은 자료들을 참고 인용하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4. 기독교 강요의 목적

1536년판 서문은 프랑스 왕(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편지로 되어있다. 거기에 그는 《기독교 강요》를 쓰는 목적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다.

즉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변증적 문서로 이해하려면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헌사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헌사에는 기독교강요의 저술 배경으로부터 시작하여 복음주의 자들의 탄원과 핍박의 내용, 관습과 교회에 관한 잘못된 이해들이 나타나 있다

“내가 이 책을 쓰려고 할 때, 왕이여 당신의 존전에 드리고자 하는 것 외에는 내 생각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의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어떤 선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참된 경건을 배울 수 있는 원리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주로 이 책을 가지고 원하는 바는 프랑스 국민들을 섬기고 싶은 것인데, 그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주님이라 부르며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내가 보았는데, 그들 중에 몇 사람들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 책에는 가능한 교리를 가장 쉬운 양식으로 썼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바를 아주 쉽게 받을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포악이 당신의 왕조의 높은 자리에 들어왔으므로 건전한 교리가 있을 여지가 없는 것을 나는 보았기 때문에, 내가 가르쳐야 할 사람들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이 책을 쓰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했고, 또 당신에게는 이것을 나의 신앙고백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아마 이 교리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을 것이며, 칼과 피로써 당신의 왕국을 지금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이 교리를 반대하여 심히 격노하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칼빈의 목적한 바는 기독교 교리 전체를 일종의 교리 교본으로 간단하게 해명하여 쓰는 것이었다. 그런데 1535년 초에 프랑스에 유혈 핍박이 있은 후에 칼빈은《시편 강해》서문에 말한 대로, 국민들을 그때 핍박한 것은 재세례파 교인들과 선동적인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핍박을 정당화 시키려고 하는 것을 듣고 신앙 변증의 목적에 유용한 책을 쓰려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을 첨가했을 것은 틀림이 없다.

역사적으로 이 두 가지가 다르면서도 동시에 야기된 목적은 동등한 흥미를 갖게 한다. 그러나 신학적 관점에서 전자(교리 교본)는 월등하게 중요한 것이다. 칼빈 자신도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으로 얼마 동안 그 변증적 부분은 손을 대지 않았고 특히 ‘왕에게 보내는 편지’는 거듭되는 증보판에 거의 변함없이 그대로 있었다.

1536년판은 새로 개종한 독자들에게 알려줄 원리들을 쓴 초보적(初步的) 교리의 요약이었다. 구체적이고 건설적 목적이 주요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 초판은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독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만일 이 초판의 프랑스어 번역이 나왔더라면 더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라틴어 제2판(1539년)의 ‘독자들에게 알림’에서 칼빈은 자기의 처음 목적을 정의하고 수정하였다. 여기에서는 그는 개혁주의 교리의 간결한 강해를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는 것보다는 성경을 읽는데 적절한 교리적 서론(序論)을 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개혁주의의 일반 대중보다 신학도를 위한 책을 쓰는 방향으로 나갔다. 멜랑히톤이 《신학통론》(Loci Communes)을 출판했을 때, 칼빈은《교의 대요》를 씀으로써 신학도의 지침서 역할을 하며 신학적 지도를 지향했던 것이다.

라틴어《기독교 강요》1539년의 제2판 서문에 그는 기록하기를 “나의 목적은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쉽게 읽도록 해서 성경 이해에 진전(進展)이 있도록 하고 지장 없이 바로 나갈 수 있게 준비시키고 가르쳐 주는데 있다. 나는 기독교 전체를 각 부분에 있어서 이렇게 이해하고 이런 순서로 요약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내가 말하는 교리의 양식을 바로 이해하면 성경에서 스스로 찾아야 할 것과 자신의 목적을 무엇에 관련시켜야 할 것도 쉽게 판단하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칼빈은 그의《기독교 강요》를 주석의 보충으로, 그리고 그의 교리적 확신을 잘 발전시킬 입문서로 생각했다. 앞으로 독자들에게 설명할 기회가 있으면 성구들과 함께 다시 써야 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기독교 강요》의 유일(唯一)한 목적이 아니다. 칼빈은 신학의 특별한 연구에만 몰두하지 않은 많은 독자 대중이 더 알고 싶어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던 교훈적 목적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를 프랑스어 번역으로 출판했다.

1541년 프랑스어 번역판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으로 독자들이 더 유익을 받게 하기 위하여, 이 책을 사용하는 법을 간단히 말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 때, 이 책의 목적한 바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바란다.

우리 구주께서 성경에 자신의 지혜의 무한한 보고를 보이고자 하였기 때문에, 성경은 사람이 아무도 더할 수 없는 완전한 교리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잘 훈련되지 않는 사람은 성경이 바라는 목적대로 바로 나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책임을 받은 사람이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의 말씀으로 가르치고자 하신 것을 우리가 발견하도록 인도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나는 이 책이 너무 자랑이 될까 염려하면서도,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경을 참으로 잘 이해하는데 열쇠와 입문이 되고 접근하게 하는 것이 될 줄을 믿는다.”

 

맺는 말

지금까지 살펴 본 바대로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개신교인들의 복음적 신앙을 체계화시킨 교리이면서 동시에 ‘갓 태어난, 새로운, 변질된 신앙’으로 오해를 받고 있는 개신교 신앙의 내용을 당시의 카톨릭 사회에 보여준 변증서이다.

이 책을 통해 칼빈은 한편으로는 카톨릭 교도들로부터 이단자와 난동자로 오해를 받고 있는 개신교도들을 변호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카톨릭 교회가 갖고 있는 신앙의 내용을 심하게 비판하고 있다. 변호와 비판의 기준은 물론 복음의 기초가 되는 성경이다.

칼빈이 이렇게 당시의 절대 권력의 기초가 되는 카톨릭교회를 비판하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인문주의적 사상에 의한 것이라고 보여 진다. 당시 사람들이 보다 새로운 인간다움을 추구하면서 새 시대의 인간상을 실현하려던 고전의 연구는, 그 시대의 지성인들에게 교회 중심적 세계관을 거부하게 하는 동인(動因)이 되기도 하었다.

여기에서 고전중의 고전으로 간주되던 성경의 자유스러운 연구는 성경을 접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틀에 박힌 제도적 외면 신앙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에 의한 개인의 신앙 고백적인 내면 신앙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카톨릭 교회는 이러한 개인 신앙운동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심지어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로 까지 몰고 가서 국가의 공인 아래 종교재판(Inquisition)을 실시했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투옥, 추방, 재산몰수, 화형, 방화, 협박을 당하였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데 문제가 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쓴 때는 이러한 탄압이 절정에 이른 1530년대 중반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피신을 하고 있었으며, 칼빈 역시 제네바에 와서 이러한 소식들을 종교 망명자들을 통해 듣고 있었다.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헌사를 통해 그가 말하는 것은, 국가의 통치는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므로, 종교재판과 개신교의 탄압으로 인해 자행되는 모든 행위들을 공정하게 조사해서 판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조국 프랑스에서 프란시스 1세에 의한 정치를 통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이 보존되며, 진리가 수호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유지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묻고 있다.

칼빈은 당시 카톨릭 교회가 신봉하고 있는 교회의 제도와 교리들을 열거하면서 개신교의 복음주의적 교리와 차별화를 시킨다. 지금까지 구원을 이루는 길이라고 믿던 면죄부, 고백성사, 적선행위, 인간의 공로 등이다. 동시에 교회의 절대 권위를 유지시키기 위한 신비스러운 미사와 성자숭배, 마리아 숭배, 교황숭배 등이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구하려는 적 그리스도적인 사탄의 유혹이며, 복음을 파괴하려는 행위라고 까지 심하게 비판하고 있다.

성경은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규범과 근거가 되어야 하며, 성경을 근거로 하여 교회가 태생됨을 말하고 있다. 성경의 권위가 교회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성경의 확장성과 성령의 역사를 재조명하며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 된다.

카톨릭의 주장하는 것처럼 교회가 구원을 집행하는 하나님의 대리기관으로서 영적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하고 성례전이 집행되는 곳이다.

사도직 계승으로서의 성직제도가 아닌 만인 제사장직에 근거한 신앙공동체를 말한다. 이런 면에서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오늘을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변증서이며 동시에 복음주의적 신앙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는 개신교의 교리서이기도 하다.

출처 : 개혁신앙연구회
글쓴이 : 예수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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