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교회영성묵상

나를 감격케한 간증

공격이 2011. 1. 26. 16:00

 

 

□페르페투아와 펠리키타스의 순교사건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스데반의 순교이후 예루살렘에 큰 피박이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이런 박해는 오히려 복음의 확신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는 유대왕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데, 기록상으로 볼 때 이는 두 번째 순교였습니다. 이때가 41년경이었습니다. 바울이 회심했을 때를 35년경으로 보면, 그로부터 약5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정치적인 박해가 시작된 것은 64년 부터였습니다. 그해 6월 18일부터 일주일간 계속된 화재가 로마시의 약 40%를 불살랐는데, 이것은 기독교 박해의 구실이 되었습니다. 이를 전후하여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가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기독교는 더욱 확산되었고 바야흐로 기독교회는 외부적인 권위 곧 로마정부와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냐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기독교는 두 가지로 대답하는데, 즉 순교와 변증이었습니다. 신앙을 위하여 기꺼이 순교의 길을 가는 한편, 동시에 기독교 신앙의 정당성을 변증하기 시작 한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와 비난의 현실에서 칼 대신 펜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117년경에는 안디옥의 익나티우스가 맹수형으로 순교했고, 136년경에는 로마의 감독 텔레스포루스가 순교했습니다. 폴리갑은 서머나에서 86세의 나이로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폴리갑은 그 이름의 의미처럼 “많은 열매를 맺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 날이 2월 23일이었습니다. 165년경에는 위대한 변증가 저스틴이 순교했습니다. 177년에는 리용에서 특별히 혹독한 박해가 시작되었는데, 유세비우스는 이 박해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남겨 두었습니다. 180년에는 아프리카 교회가 스킬리라는 마을에서 첫 번째 순교자를 냈습니다.

 

이런 박해에도 기독교는 요원의 불길처럼 펴져가지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박해가 교회의 확장을 막지 못한 것입니다. 거구로 그것은 교회확장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이론적으로 공격하고 비판하는 일에 앞장섰던 켈수스는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기독교가 후릴 로마제국을 압도하게 될 것임을 예견했던 최초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을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을 파멸로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도 했습니다.

 

3세기 교회 역사는 지중해 남부 연안 지역에 대한 박해로 시작되었습니다.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제국 내의 종교적 통일을 유지할 필요를 느끼고, 소위 “정복되지 않는 태양”을 예배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다신교적 상황에서 태양숭배 요구는 종교혼합주의 였습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종교혼합주의를 받아드릴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곧 박해가 뒤따랐습니다. 이 박해는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해서, 많은 이들이 세베루스 황제를 마지막 적그리스도가 출현하는 징조로 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세베루스 칙령이 발표된 202년은 박해사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때 위대한 신학자 이레니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신학자 오리겐의 부친 레오니데스가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오리겐은 어머니가 그를 옷에 감추는 바람에 죽임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세베루스는 기독교로 개종하는 자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함으로써 개종 자체를 금했습니다. 이제는 개종자도 전파자도 모두 함께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한 가지 특이한 순교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페르페투아와 펠리키타스 등 5명의 순교였습니다. 이들 5명의 순교자들은 카테쿠멘들, 곧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학습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체포된 것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황제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펠르페투아는 상류층의 귀부인으로 임신 중 체포되었습니다. 펠리키타스등 4사람은 페르페투아의 하인이었습니다. 이 4명의 노예는 펠리키타스를 비롯하여 레보카투스, 사투르니누스, 세쿤두르스였습니다. 그 이름들이 보여 주듯이 펠리키타스외의 3사람은 남자노예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들에 대한 순교이야기가 남아 있어 당시의 정황을 헤아리는데 유용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이 순교기『 페르페투아와 펠리키타스의 순교 』가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해 기록된 점이나 발견 시기 그리고 지역적 특색 등을 고려해 볼 때 이들은 아마도 몬타누스파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건이 발생했던 카르타고가 몬타니스트 운동의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이 흔하지 않은 순교기록을 통해 당시 순교적 상황을 헤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로마정부의 반감과 탄압, 순교자들에 대한 교회의 존경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귀부인이었던 페르페투아가 체포되자, 그 아버지는 신앙을 포기하고 생명을 구하도록 애걸하며 종용하였습니다. 당시 페르페투아는 겨우 21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페르페투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물이 다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을 새로이 바꿀 수 없듯이, 나도 기독교 신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 이름을 바꿀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들의 신앙을 포기하도록 하는 노력이 다방면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재판은 지연되고 길어졌습니다. 페르페투아는 체포된 후 8일 만에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그가 출산의 고통으로 비명을 지를 때 간수들은 “그렇게 아파하면서 어떻게 당신이 원형 경기자에서 짐승들에 의해 죽을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그녀의 답변은 순교에 대한 당시 신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나의 고통은 나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맹수들에 행 할때는 나 아닌 다른 이가 내안에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내가 그를 위해 고난을 당하니 그가 나대신 고통을 받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페르페투아의 갓난아이는 곧 다른 여신도에 의해 입양되었습니다. 이제 순교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먼저 남자3명, 곧 레보카투스, 사투르누스, 세툰두르스가 원형경기장으로 끌려나왔습니다. 일주일간 굶겨두었던 맹수를 풀어주자 맹수들은 묶여 있는 그들에게 달려들었도, 곧 3사람은 피에 주린 군중들의 환호소리를 뒤로 한 채 용감하게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곧이어 페르페투아가 그의 노예인 페리카타스의 손을 잡고 원형경기장에 나타났습니다. 경기장을 꽉 매운 군중들은 놀라기 시작했습니다. 귀부인이자 자유인이 예수를 믿었다는 사실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침착함과 예모를 흩트리지 않은 것 때문에 놀란 것도 아니었습니다. 군중들이 놀란 것은 자유인인 페르페투아가 노예인 펠리키타스의 손을 잡고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손을 잡았다는 것은 “동료”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적 관습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유인이 노예와 한 상에서 음식을 먹거나 같은 자리에 동석하다는 것은 상상할 수 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노예는 손을 잡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페르페투아는 수많은 이교도들 앞에서 견딜 수 없는 한계를 뛰어 넘는 신앙의 용기와 더불어 사회적 신분을 뛰어 넘는 신앙의 위대성을 공개적으로 시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침묵은 웅변이었습니다. 그녀는 말없이 신앙의 힘을 보여 주었습니다.

곧 이어 페르테투아와 펠리키타스는 달려드는 들소에 의해 받혀 몸이 찢겨가기 시작했습니다. 찢겨진 몸으로 페르페투아는 자신의 머리를 묶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머리가 풀어진 것은 슬픔과 애도의 상징인데 이날은 그녀의 가장 축복된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여인은 경기장 한 가운데서 피를 흘리면 죽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두 여인은 마지막 작별의 입맞춤을 나눈 후 다시 칼에 찔려 죽어갔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사회적 신분의 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때가 202년 3월7일이었습니다. 이 참혹한 사건이 있은 후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박해가 중단되었습니다. 물론 폭풍이 지난 언덕을 위해 잠시의 고요가 찾아 왔으나, 그 평화로움은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페르페투아와 펠리키타스의 순교기는 광범위하게 읽혀졌고 특히 북아프리카에서 이 순교기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책이 성격보다 더 많이 읽히고 있다는 점을 개탄하기까지 했습니다.

 

출처“이상규교수의 교양으로 읽는 역사. 이상규. SFC. pp38-43.